[Narrative Report]“한국에서 다문화가정으로 산다는 건…”

동아일보 입력 2010-08-05 03:00수정 2012-01-0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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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필리핀 처가 찾은 김효철 씨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내러티브 리포트(Narrative Report)는 삶의 현장을 담는 새로운 보도 방식입니다. 기존의 기사 형식으로는 소화하기 힘든 ‘세상 속 세상’을 이야기체(Storytelling)로 풀어냅니다. 동아일보는 내러티브 리포트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더욱 깊이 있는 세상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다문화가정 자녀 가운데 초중고교 재학생이 2만 명을 넘어설 만큼 다문화가정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문화의 차이, 보이지 않는 차별 등 그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농협문화복지재단은 다문화가정이 많은 농촌 사회의 특성을 고려해 2007년부터 ‘농촌 다문화가정 모국 방문 지원사업’을 펼쳐 총 606가구의 모국 방문을 지원했다. 올해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한 가정의 모국 방문을 동행 취재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달 27일 오후 11시 50분, 필리핀의 클라크필드 국제공항.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 대부분이 여행용 가방이나 골프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그는 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종이박스 3개를 챙기고 있었다.

“별거 아닌데요. 이건 신라면이고, 이건 컴퓨터. 신라면은 처가 식구들이 좋아하고 컴퓨터는 처가에 없어서…. 결혼하고 처음으로 처갓집에 온 건데 사위가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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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철 씨(43)는 짐을 잔뜩 실은 카트를 끌며 멋쩍게 웃었다. 8년 전, 그는 혼자서 이곳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아내 김가영 씨(32)와 딸 소영 양(7)과 함께 왔다. 클라크필드는 아내의 고향이다.

헬로, 생큐, 알러뷰


결혼 이후 처음으로 찾은 처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장모를 비롯한 아내의 친정 식구들은 그를 따뜻하게 반겨줬다. 왼쪽부터 김효철 씨와 딸 소영 양, 아내 김가영 씨, 그리고 장모. 클라크필드=한상준 기자
2002년 1월, 그는 광고가 실린 신문지 한 장을 찢어들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모시고 사는 홀어머니에게도 서울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은 해야겠는데, 찾기는 힘들고…. 주변에 보니 국제결혼을 한 사람이 몇 명 있더라고요. 어머니께는 말씀 안 드렸어요. 뭐 좋은 거라고….”

몇 차례 맞선이라는 걸 보긴 했다. 그러나 시골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짓는, 게다가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말하는 게 조금은 어눌한 남자에게 시집오겠다는 여자는 없었다.

물어물어 찾은 종로3가의 사무실에는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결혼하고 싶어서 왔다고. 사장이라는 남자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여권 있죠. 돈도 준비됐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입금할 수 있다고 했다. 그제야 사장은 웃으며 책상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왔다. 종이에는 외국 여자들의 사진이 가득했다.

“이 여자들을 만난다는 건 아니고…. 일단 이 나라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봐요. 아, 가격은 다릅니다. 비용은 조선족 2000만 원, 베트남 1000만 원, 필리핀 800만 원….”

말이 통하는 조선족이 가장 비용이 높았다. 똑같은 동남아라도 비용이 달랐던 것은 애를 낳았을 때 그나마 혼혈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장은 설명했다. 필리핀을 선택했다. 가장 싸니까.

이틀 뒤, 그는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라는 것을 탔다. 그런데 영 불안했다. 이렇게 빨리, 아무 준비 없이 가도 되는 건가.

“뭘 걱정해요. 가서 보고 마음에 든다, 안 든다만 말하면 돼. 말은 무슨. 안녕하세요를 영어로? ‘헬로.’ 고맙습니다는 ‘생큐’, 사랑해요는 ‘알러뷰’. 됐네.”

필리핀 도착 후 사장은 그를 현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한국인에게 맡기고 돌아갔다. 호텔방에서 열흘 동안 필리핀 여자 12명을 만났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는 없었다.

‘여기서도 못 만나는구나….’

밤에 호텔방에서 혼자 술만 마셔대는 그에게 여행사 사장이 “우리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참한데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보라”고 말했다. 2월 5일, 필리핀에 간 지 열흘 만에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다.

착해 보였다. 성격도 밝은 것 같아 좋았다. 그날, 두 사람은 김 씨의 호텔방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약혼을 했고, 7일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8일 그는 귀국했다. 아내를 한국에 데려오기 위한 준비를 하러.

가족이 잘살 수 있다면…


주민등록증에 적힌 이름은 김가영. 그러나 8년 전까지 그녀는 ‘쑤씨’라고 불렸다. ‘Josina Susie’가 그녀의 이름.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집은 항상 가난했다. 15세 때부터 가정부 생활을 시작했다.

공부는 꽤 잘했다. 대학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웠지만 졸업은 못했다. 등록금을 가족 생활비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국 사람과의 결혼?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어느 날, 집주인이 한국 남자를 집에 데려왔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첫인상은 별로였다. 하지만 수줍게 웃는 모습이 착해 보이긴 했다.

“잘 생각해 봐. 여기서 가정부로 일하는 것보다 한국에 가는 게 낫다니깐. 매달 돈도 부쳐줄 테고, 그 돈이면 가족들도 잘살 수 있고.”

집주인 말을 듣고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가서 잘살면 되지”라는 엄마의 말이 야속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약혼부터 결혼까지 순식간이었다. 남편은 결혼 준비에 보태라며 16만 페소(약 400만 원)를 줬다. 가정부로 40개월은 일해야 만질 수 있는 돈. 집주인 말이 실감났다.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금방 오겠다고 했지만, 다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넉 달 뒤, 야속하게도 남편은 다시 왔다. 어쩔 수 없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가족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가서 난 어떻게 살까.’

펑펑 우는 사이, 비행기는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은 잘사는 나라라고 하더니, 진짜였다. 서울은 차도 많고, 건물도 깨끗했다. 남편 누나 집으로 갔다. 넓은 아파트. ‘나도 이런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다음 날, 남편은 “집으로 가자”고 했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렸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남편이 모는 트럭을 타고 1시간 반. 차를 오래 탄 적은 처음이라 엉덩이가 아팠다. 더 충격적인 것은 서울과 너무 다른 동네의 모습이었다. 경북 울진군. 산밖에 없었다. 다시 눈물이 났다.

시댁 식구들의 따뜻한 손길

그렇게 신혼생활이 시작됐다. 9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두 사람은 가장 젊었다. 남편은 이집 저집 농사를 대신 지어주기 때문에 100마지기의 논을 경작한다. 고추, 감자 농사도 한다.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아내는 한국에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처음으로 호미와 낫을 잡아봤다. 농사일도 힘들었지만, 외로움은 더 참기 힘들었다. 밤마다 우는 아내에게 남편이 할 수 있는 건 휴대전화를 건네는 것밖에 없었다. 남편은 지금도 필리핀 말은커녕 영어도 하지 못한다.

“여기 너무 힘들어. 말도 안 통하고…밥도 못 먹겠어.”

엄마도 함께 울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오라는 말은 안 했다. 오히려 “빨리 적응하라”고 다그쳤다.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적응하는 수밖에. 말을 먼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막내 도련님이 도와줬어요. 대구에서 대학 다녔는데 영어 잘해요. 한글 책, CD도 보내주고. 그렇게 공부 시작했어요.”

농사일이 끝나고 나면 남편도 공부를 도와줬다. ‘아야어여’부터 시작한 한국말이 서서히 늘었다. 다행히 시어머니도 며느리를 예뻐했다. 시어머니가 자기를 부르는 “아가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았다. 그런데 여름이 끝나갈 무렵, 아내는 생리가 멈췄다는 것을 알았다. 고민했다. 남편에게 알려야 하나.

“애 낳으면 못 헤어지잖아요. 그때는 불안했어요. 여기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필리핀에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이 사람 이제 매운탕도 잘 끓여요”


고민 끝에 임신 사실을 알렸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아내의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남편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는 입덧과 함께 치킨을 찾았다. 군청 소재지와 너무 멀어 치킨도 5마리 이상 주문하지 않으면 배달을 오지 않는 곳. 하지만 남편은 왕복 3시간 거리를 수시로 달려 치킨을 사왔다. 더 먹고 싶은 건 없냐고 물었다. 농사일도 쉬라고 했다.

2003년 6월, 딸 소영이가 태어났다. 남편도 울었고, 아내도 울었다. 남편은 내 자식을 낳아준 아내가 고맙고,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울었고 아내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보니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이제 진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울었다.

아이가 생기고, 시집온 지도 1년이 넘어가자 아내의 한국 생활도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일할 때 MP3 들으면 하나도 안 힘들어요. MP3는 아주버님이 사줬어요. 노래도 넣어주고. 좋아하는 노래요? 어머나, 춤추는 탬버린, 동반자…. 아, 원더걸스하고 2NE1 노래도 할 줄 알아요.”

울진군의 도움으로 비슷한 처지의 이주여성들을 만나게 된 것도 도움이 됐다. 2002년엔 울진군 내 이주여성이 3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50명 정도로 늘었다. 한 달에 한두 번 만나 한국 요리도 배우고, 햄버거와 치킨을 먹으며 수다도 떤다. 아내가 웃음을 되찾자, 남편도 달라졌다. 그렇게 마셔대던 술도 아내의 성화에 끊었다.

“그냥, 좋아요. 어머니도 건강하시고, 아내도 있고 딸도 있으니까. 이렇게 지낼 줄은 몰랐으니까 신기하죠. 이 사람 이제 매운탕도 잘 끓여요. 제법 먹을 만해요.”

그렇다고 부부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고민은 딸 소영이의 미래. “시골은 오히려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차별이 없어요. 주변에 혼혈 친구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도시에 갔을 때가 걱정이죠. 이주여성, 혼혈에 대한 생각은 농촌보다 도시가 더 나쁜 것 같아요. 그거죠. 놀림 당하지는 않을까, 상처 받지는 않을까….”

‘운’에만 맡기기에는…

부부는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가족들도 아내를 허물없이 대했고, 남편은 다달이 20만∼30만 원을 처가에 보내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이도 일찍 태어났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아내의 성격도 한몫했다. 하지만 모든 다문화가정이 이렇지 않다는 것을 부부는 잘 알고 있다.

“부산에서 베트남 여자 죽은 거 다 알아요. 우리끼리 ‘너무 안타깝다’고 울었어요. 페이스북에서도 다들 안타까워해요. 그런 결혼 못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잘 지내자 주위에서 “필리핀 여자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 몇 차례 들어왔었다. 그때마다 아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필리핀 여자, 한국 오면 너무 힘들어요. 그러면 남편이랑 가족이 잘해줘야 하는데 누가 장담해요? 그래서 안 해요.”

듣고만 있던 남편이 조용히 거들었다.

“국제결혼을 이렇게 많이 하는데, 무조건 운에 맡기거나 두 사람이 알아서 잘 지내라고 하는 건…. 무책임한 것 아닐까요.”

클라크필드=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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