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1부]<4>생활정치 왜곡하는 민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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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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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치, 민심과 通하고 있나
“정말 못들어줄 민원 있지만 거절땐 야박하다 뒷말 각오해야”
■ 한나라 윤상현 의원

《‘민생정치’ ‘생활정치’ ‘정책정치’. 요즈음 우리 정치권의 화두가 되다시피 한 말이다. 실제로 상당수 국회의원은 휴일, 명절 구분 없이 1년 365일 지역구 곳곳을 샅샅이 훑는다. ‘생활정치’의 기치하에 지역 유권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많은 의원은 지역구와 유권자를 의식하다 보니 “생활정치가 민원정치로 전락하는 듯한 회의가 든다”고 토로한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의 차이점을 모르겠다”는 한숨도 나온다. 지역 이해관계가 우선시되는 현실에서 ‘정책정치’도 구호에 그치기 쉽다는 게 의원들의 고민이다. 예를 들어 세종시 문제만 해도 충청지역 의원들은 반사적으로 ‘원안’을 고수하는 게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정책정치가 지역현안 해결쯤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많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역 유권자의 민원 해결에 매달리거나 지역만의 이익을 대변하려 하는 지역이기주의를 버려야 생활정치, 정책정치가 구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도 “국회의원은 지역과 정파, 소속 정당보다는 국익을 고려하는 것이 본래 직분”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유권자들의 올바른 이해가 필수 요소”라고 말했다.》

일요일(18일). 한나라당 초선 윤상현 의원(인천 남을)은 오전 4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취가 남아있었지만 일어나야 한다.

오전 5시. 동네 산에 오르면서 주민들과 악수한다. 함께 배드민턴을 치면서 ‘스킨십’을 늘리기도 한다. 전용 배드민턴장 건설 얘기는 이날도 화제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어 산악회 순례시간이다. 휴일 아침에는 곳곳에서 산악회 버스가 떠난다. 출발 전 버스마다 올라 회원들에게 인사한다. 몇몇 산악회는 출발시간이 같기 때문에 분 단위로 시간을 배분해 출발지점을 돌아야 한다. 이날도 교통신호를 아슬아슬 통과하면서 4대의 버스를 찾았다. 대부분 반가워한다. “매번 이렇게 나올 필요 없다”는 주민들도 있지만 몇 개월만 안 보이면 “이제 관심이 없어졌나 보다”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빼곡한 지역구 일정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의 7월 11∼17일 주간일정표. 30분 단위로 각종 지역구 활동 계획이 빼곡히 적혀 있다. 추가 기입한 흔적도 보인다. 이 표는 지역구 일정만 적은 것으로 국회 일정과 비공식 일정은 따로 정리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빼곡한 지역구 일정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의 7월 11∼17일 주간일정표. 30분 단위로 각종 지역구 활동 계획이 빼곡히 적혀 있다. 추가 기입한 흔적도 보인다. 이 표는 지역구 일정만 적은 것으로 국회 일정과 비공식 일정은 따로 정리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아침을 차에서 샌드위치로 때우고 오전 9시에 지역사무실에서 민원을 들고 온 지역구 관계자를 만났다. 들어주기 힘든 민원이다.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지만 “야박하다”는 뒷말은 각오해야 한다.

오전 11시 예배시간에 맞춰 교회로 이동했다. 다니던 교회가 따로 있지만 요즘엔 큰 교회 몇 곳을 번갈아 간다. 윤 의원은 지역 내 교회 목사 이름을 모두 외우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예배가 끝나기 전 교회에서 나와 한 노인정 월례회의에 참석했다. 지역 내 50여 개의 노인정 월례회의는 다 챙긴다. “김치냉장고를 놔 달라” “에어컨을 설치해 달라”는 등의 부탁을 받으면 구청에 얘기해서 성사되도록 해야 한다.

곧바로 차를 돌려 한 직능단체 모임이 열리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이런 모임에는 빠질 수 없다. 어디는 가고 어디는 안 가면 “차별한다”고 한다. 평소라면 식사도 같이하고 술도 나눴겠지만 이날은 점심 약속이 있어 자리를 빠져 나왔다. 오후에는 지역민원 관련 회의가 열렸다. ‘법원 출입구가 대중교통 환승장 반대편에 있어 불편하다’는 불만이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출입구 앞 상권도 무시할 수 없어 고민하고 있다. 지역 내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이 구청과 시공사의 마찰로 지연되는 문제도 윤 의원이 나서서 처리해야 할 문제다. ‘전신주 지중화(地中化)’ 사업에 국비 지원이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회의도 이어졌다.

주말이라 지역구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국회가 열릴 때는 여의도와 지역구를 몇 번씩 오간다. “지역구 의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체력입니다. 주량도 세야 합니다.”

윤 의원은 소속 외교통상통일위 활동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싶다. 잠을 줄여 신문을 보고 출장길에 필요한 책을 몰아서 읽지만 정책에 관해 공부하기엔 시간이 충분치 않다.

“주민들 가운데는 외교·안보 관련 활동보다 지역 민원 해결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민원이 해결되어도 제가 역할을 했다는 건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지역에 머무는 시간을 늘릴 수밖에 없습니다.”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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