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내 삶을 이끈 3가지 W-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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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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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정책차관보 지낸 강영우 박사의 아들 폴 강 박사

미국 워싱턴 아이닥터스 병원의 폴 강 박사. 안과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눈을 고쳐주겠다던 네 살 꼬마(사진 아래)는 꿈을 이뤘고 
동생 크리스토퍼 강 씨(33)는 32세에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입법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아버지 강영우 박사와 동생과 함께 한 폴
 강 박사(사진 위).
미국 워싱턴 아이닥터스 병원의 폴 강 박사. 안과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눈을 고쳐주겠다던 네 살 꼬마(사진 아래)는 꿈을 이뤘고 동생 크리스토퍼 강 씨(33)는 32세에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입법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아버지 강영우 박사와 동생과 함께 한 폴 강 박사(사진 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아이 닥터스(Eye Doctors)’ 병원은 워싱턴의 정관계 고위급 인사가 많이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월간지 ‘워싱토니언’이 지역 의료인 65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2010년 가장 뛰어난 의사(안과분야)’로 꼽힌 한국계 미국인이 이 병원에 있다. 그는 최근 워싱턴을 중심으로 한 안과 의사들의 모임인 ‘워싱턴안과의사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됐다. 30대 나이로는 이례적이다.

그는 네 살 때 시각장애인인 아버지를 위해 “안과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눈을 고쳐주겠다”고 다짐했다. 하버드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인디애나대 의학전문대학원을 거쳐 안과의사가 됐다. 시각장애인으로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의 장남 폴 강(한국명 강진석·36) 박사다.

강 박사는 하버드대 졸업 후 모교이자 미국의 명문고로 꼽히는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에서 1년 동안 입학사정관으로 일했다. 미국에서 성장했지만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4일 아이닥터스 병원에서 강 박사를 만났다. 그를 만든 교육과 그가 생각하는 교육에 대해 들었다.

병원에는 강 박사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다른 주에서 몇 시간 동안 자동차를 타고 온 환자들로 북적였다. 강 박사는 “환자들이 나를 베스트닥터로 꼽는 이유는 하버드 졸업장 때문이 아니라 원하는 일(환자를 돌보는 것)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강 박사는 ‘Why(왜)’ ‘What(무엇)’ ‘Happiness(행복)’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그는 국내 명문대와 미국 아이비리그 진학을 목표로 치열하게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의 노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하면 모든 기회가 문을 열고 어서오라고 환영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다”고 했다.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대처럼 모든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공부하는가’라는 고민 없이 하버드대 입학만을 목표로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자칫 하버드대에 진학해도 졸업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40%의 학생 중 한 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부모가 시켜서, 남들이 좋다니까, 좋은 직장에 가기위해 공부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입학사정관으로 일했던 강 박사는 목적 없이 하는 비교과 활동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고 조언했다. 비교과 활동으로 원서를 가득 채웠다 할지라도 자신이 충분히 고민해 얻은 목표로 종합되지 않으면 까다로운 입학사정관의 눈에 의미 있게 보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스펙’을 만들기 위해 취학 전부터 하루 10시간씩 바이올린을 켜고 오지마을로 봉사캠프를 떠나고 의무적으로 스포츠를 하는 일부 학생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야 한다고. 원하는 일은 행복한 일이어야 한다고. 행복해야 열정적으로 임할 수 있고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젊은 나이에 그가 안과의사협회장이 된 것도 마찬가지다. 강 박사는 자신이 하버드대 출신이기 때문에 협회장이 된 것이 아니라 환자를 잘 돌보는 것을 목표로 삼고 환자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에 선출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만 행복하다면 직업이 안과의사이든 변호사이든 헤어디자이너든 웨이터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강 박사는 “이런 내 가치관은 나의 두 딸과 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면서 “아이가 행복하다면 어떤 공부나 일을 해도 좋다. 부모로서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쉽게 동의할 순 없었다. 우리 교육현실에 비춰볼 때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강 박사는 “나의 의견이 무조건 옳다고 볼 수 없고 한국에서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일생에 단 한 번도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원하지 않는 악기연습을, 운동을, 클럽활동을, 공부할 것을 강요받은 적이 없다”면서 “이런 소신을 가지고 부모님이 교육한 결과가 나와 나의 동생이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강 박사의 동생 크리스토퍼 강(한국명 강진영) 씨는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정치학을 복수전공하고 듀크대 법학전문대학원를 졸업한 뒤 32세에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입법특별보좌관(차관보급)에 임명됐다.

▶미국 명문대 입학사정관은 학생의 어떤 점을 집중적으로 평가할까요? C2면에는 올해 프린스턴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에 진학하는 국내파, 해외파 합격생들에게 듣는 ‘입학사정관을 사로잡은 비결’이 소개됩니다.

워싱턴=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 폴 강 박사가 하버드대 지원 시 제출한 에세이의 일부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읽어주신 이야기’


잠시 후 부드럽고도 체면사의 기법을 닮은 듯한 아버지의 책 읽는 음성이 나를 사로잡았다. 또박또박 부드럽게 읽어주시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유치원의 좁은 세계에서 사는 나를 멀고 먼 상상의 세계로 데리고 가곤 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아버지의 점자책을 자세히 보았다. 나의 선명한 상상의 뿌리인 그 책은 볼록볼록 튀어나온 점들이 페이지를 채웠을 뿐 그림 한 장도 없었다. 점자 페이지 위에 손을 얹어 놓고 이리저리 더듬어 보며 아버지는 어떻게 그것을 읽으실까 생각해 보았지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아직껏 나는 아버지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실명으로 내가 잃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육안이 없이도 볼 수 있는 세계를 보여주신 시각장애인 아버지를 가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두 눈을 뜬 내가 두 눈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안내자가 아니라 시각장애인인 아버지가 정안자인 내 인생을 안내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외모로는 장애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버지가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더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나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고귀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함으로써 터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로 인해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도전하며 편견과 차별이 없는 사회 건설에 기여할 의욕을 갖게 되었으며 누구나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고교 2학년때 평균성적은 B, 하지만…”

강 박사는 대학입학 당시 하버드대를 비롯해 스탠퍼드대, 컬럼비아대에 모두 합격했다. 완벽한 스펙을 자랑할 것 같지만 11학년(한국기준 고교 2학년) 첫 학기에 그는 수학성적으로 ‘C’를 받았다. 당시 그의 학기 평균 성적은 ‘B’였다. 성적표를 받은 다음 날 강 박사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진학담당 교사를 찾았다. 교사는 “평균 B학점이라도 아이비리그에 진학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아라. 단 앞으로는 성적이 향상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희망을 가진 강 박사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12학년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스피치, 디베이트(토론) 대회에 출전한 경험과 고교 때 방송반 활동을 통해 기른 의사소통능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추천서와 면접에서도 남다른 평가를 받았다. 진학 담당 교사는 추천서에 “그의 높은 행복지수와 낙천적인 성격, 긍정적인 태도가 하버드대 캠퍼스에 신선한 공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적었다.

그가 쓴 에세이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읽어주신 이야기’는 하버드대 입학사정관들을 감동시키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면접에서 그는 “시각장애인 아버지와 사는 것이 비장애인 아버지와 사는 것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렇게 답했다.

“저는 눈이 보이는 아버지와 살아 본 적이 없어서 그 차이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자연스러울 뿐입니다. 시각장애인인 아버지로부터 모든 일에 도전하는 품성,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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