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프로젝트]“파도 덮치고…아, 이대로 죽는가”

  • 입력 2009년 1월 1일 00시 11분


■ 갈라파고스 프로젝트 ‘장보고호’ 동승 취재

사흘간 연락 두절됐던 항해팀 극적 재회

상어 출몰지역 탐사위해 헤엄쳐 가기도

지난해 11월 22일 오후 10시. 카리브해의 도서국가 바하마의 그랜드바하마 국제공항에서 한 무리의 한국인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22일 공항에서 봐요’라는 짧은 구두 약속만을 믿은 장보고호의 선장 권영인(48·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박사와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이역만리에서 상봉했다. 도착 전 취재팀과 권 박사 팀은 사흘 동안이나 연락이 불통됐다. 취재팀은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는 와중에 짐과 장비를 몽땅 잃어버렸다 다시 찾느라 약속 시간보다 7시간이나 늦었다.



권 박사는 초보 항해사로서 등대의 불빛에만 의존하는 야간항해를 감행해 겨우 약속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했다. 7시간 동안 취재팀을 믿고 기다려 줬기에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10월 장보고호 출항 때 현지 취재를 했던 취재팀의 이성환 PD가 “박사님, 그동안 많이 말랐네요”하며 반갑게 농을 던지자 권 박사는 “생전 처음으로 집채만 한 파도를 봤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 허리케인이 할퀸 바하마

바하마의 서쪽은 2004년과 2005년에 이어 올해에도 이곳을 할퀴고 간 허리케인에 큰 피해를 보았다. ‘꿈의 휴양지’로 불리는 카리브해 연안의 ‘파라다이스’ 바하마는 평균 시속 70km의 거센 바람과 산더미 같은 파도로 섬의 일부가 파괴된 듯 보였다.

권 박사와 취재팀은 좀 더 서북쪽에 있는 작은 섬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주돛과 보조돛을 펴고 미끄러지듯 두 시간쯤 달리자 멀리 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권 박사는 곳곳에 도사린 암초와 산호를 피해 배를 모래톱 가까이로 조심스럽게 몰았다. 투명한 코발트색 바다 아래로 각양각색의 산호가 마치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어른거렸다. 권 박사는 카약을 타고, 취재팀은 헤엄쳐서 섬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 섬의 이름은 샌드케이(Sandcay). (나중에 권 박사는 “이 섬은 상어 출몰 지역”이라고 말해 헤엄쳤던 취재팀을 놀라게 했다. 미리 상어 얘기를 꺼냈다 취재팀이 겁을 먹을까 봐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 박사는 부삽과 토양 샘플을 넣는 코어 추출 장치를 꺼내 노란 배낭에 넣었다. 짧은 쇠파이프 형태의 코어 추출 장치를 모래톱에 40∼50cm 깊이로 꽂으면 최근 수년간 섬에 쌓인 퇴적물의 성분 변화를 알아낼 수 있다.

섬에 가까워질수록 할퀴고 깨진 흔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 말라 죽은 맹그로브 등걸이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섬 주변의 맹그로브 숲과 바닷가 암석은 모두 깎여 나간 상태였다. 바닷가에 폐허가 된 계단과 사람이 살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케인으로 숲과 함께 사람들의 삶의 터전마저 사라지자 섬을 버리고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자신을 ‘칼’이라고 소개한 한 어부는 “이 섬도 원래 맹그로브가 무성했는데 최근 잇따른 허리케인으로 인해 모두 파괴됐다”고 말했다. 섬 곳곳에서는 죽은 소라와 고둥 껍데기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나무가 사라진 숲 속에서는 깨진 술병과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 쓰레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소라를 비롯한 수산물의 남획과 환경 파괴 문제는 바하마가 최근 겪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날 밤 장보고호 선실 한쪽 귀퉁이에 마련된 임시 실험실에서는 이날 채취한 모래 구조를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 선상 생활

권 박사와 송동윤 씨는 27세 터울의 대학 선후배 사이다. 거의 아버지와 아들뻘이다. 신중한 성격의 과학자 권 박사와 혈기 넘치는 송 씨 사이에선 티격태격하는 말소리가 자주 들린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대선배와 후배’ 사이가 아닌 믿고 의지할 든든한 동지가 됐다.

선상 생활은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다.

지루함은 참기 힘든 선상의 일상 중 하나. 아침저녁 똑같은 즉석식품과 쉴 대로 쉰 김치가 식탁에 오르는 것도 고역이다.

선상에서 물은 기름만큼 귀한 자원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씻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송 씨가 장보고호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자 권 박사가 화들짝 놀라 한마디 하기도 했다.

○ 남아메리카 대륙을 눈앞에

장보고호는 바하마의 남쪽 섬 크루커드 아일랜드를 지나 지난해 12월 말 터크스케이커스 제도에 도착했다. 이후 도미니카공화국을 지나 이르면 이달 중순 남아메리카에 도착할 예정이다. 원래 일정보다 한 달가량 늦어진 셈이다.

178년 전 영국에서 출발해 브라질 사우바도르에서 시작한 다윈의 비글호 탐사항로와 장보고호의 항로가 이달 중에 겹쳐지게 된다. 과학자 권 박사는 돛대가 부러지고, 폭풍 속에 발이 묶이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치며 탐험가로 변모해 가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 장=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이성환 PD zacch@donga.com

영상뉴스팀=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배태호 PD newsman@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 권영인 박사 탐사 의미

다윈의 발길따라 세계 첫 해양탐험

英 - 美 NASA선 “빨라야 내년 시도”

권영인 박사와 장보고호의 도전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해양 탐험으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 탄생 200돌, 그가 쓴 ‘종의 기원’ 발간 150돌을 기념한 과학 탐사로는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영국 HMS 비글호 재단과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내년 중 다윈이 타고 항해한 것과 똑같은 현대판 비글호를 건조해 탐사에 나서는 계획을 발표한 것을 빼고는 현재까지 같은 항로를 따라 과학탐사에 나선 과학자는 공식적으로 없다. 특히 78억 원을 투자해 첨단 디젤엔진과 발전기, 우주항법시스템을 갖춘 현대판 비글호보다 권 박사의 탐사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훨씬 앞서 실행되고 있는 셈이다. 현대판 비글호의 항해는 빨라야 2010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비글호 재단 측은 밝히고 있다.

장보고호가 이번 항해를 통해 비글호가 항해한 경로를 따라 현지에서 수집한 이산화탄소·메탄 농도 등 방대한 데이터는 세계 과학계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성’과 ‘시의성’ ‘현장성’이 가미된 학술 연구로는 최적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

실제 독일 실험장비 회사 프라나테크와 장보고호를 건조한 선박회사 퍼포먼스 크루징도 그런 가능성을 보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권 박사의 출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권 박사는 자신이 수집한 탐사 정보를 국내외 과학자에게 공개해 공동 연구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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