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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13일 02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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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동당이 상징만 바꾼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정신이 담긴 국유화 강령의 당헌 4조를 개정하고, 신노동당(New Labour)을 내걸었다. 이 개혁을 주도한 이는 젊은 토니 블레어였다. 1997년 총선에서 블레어는 신노동당의 노선으로 제3의 길을 제시해 보수당 장기 집권에 마침표를 찍었다.
제3의 길을 처음 주창한 정당은 스웨덴의 사민당이었다. 1950년대 이들은 미국의 시장자본주의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사이의 길인 제3의 길을 내세웠다. 이 말이 1990년대 중반 블레어와 그의 사부(師父)인 앤서니 기든스에 의해 전통적인 구(舊)사회민주주의(‘제1의 길’)와 마거릿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제2의 길’)를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길로 부활한 셈이다.
제3의 길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해 시장의 활력을 꾀하려 했다는 점이다. 탈규제, 균형 재정, 공공서비스 개혁 등은 대처 정부의 정책을 이은 것이었다. 영국과 함께 또 다른 제3의 길의 사례였던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에 큰 영향을 미친 울리히 베크는 제3의 길을 ‘신자유주의적 좌파’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 복지’다. 적극적 복지란 기존 복지제도를 넘어서 교육개혁, 직업훈련을 통해 새로운 고용 창출에 주력하는 ‘일할 수 있는 복지(welfare to work)’를 말한다. 교육정책은 이 적극적 복지의 중핵을 이룬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가능성의 재분배’를 위한 핵심 기반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제3의 길은 실패한 기획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유럽에서 블레어 정부를 제외하곤 잇달아 실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제3의 길을 내걸거나 유사한 중도진보가 다시 소생하고 있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체코 헝가리에서 중도진보 세력이 권력을 다시 잡았으며, 뉴질랜드와 호주에서도 중도진보로의 권력이동이 이뤄졌다. 더불어 독일 벨기에에서는 중도진보와 중도보수의 대연정이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제3의 길은 계속 진화해 왔다. 고전적인 재분배 정책에 더하여 일자리 창출, 공정한 교육기회 부여, 복지서비스 개혁, 아동빈곤 해소 등과 같은 신평등주의(new egalitarianism) 정책들을 모색해 왔다. 둘째, 이 과정에서 실용노선이 강화돼 왔다. 세계화 시대가 강제하는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제3의 길은 노동과 자본이 모두 상생하는 실용주의 해법을 제시해 왔다.
문제는 제3의 길이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다. 제3의 길의 한국적 버전은 이미 김대중 정부 아래서 ‘생산적 복지’를 중심으로 논의된 바 있다. 복지국가의 기본도 갖춰지지 않은 현실을 고려하면 제3의 길보다는 제1의 길 또는 제2의 길이 먼저 필요하다는 주장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 등 우리 사회가 현재 직면한 문제들은 한국적 상상력과 해법을 요청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추격 발전’은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진행돼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가 강제하는 ‘시간과의 경쟁’은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하는 동시에 선진국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겨준다. 제3의 길을 새롭게 토론해야 할 이유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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