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인문계 모의논술 해설

  • 입력 2007년 9월 17일 03시 01분


코멘트
■ 논제

※ 다음 제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논제 1】 제시문 (가), (다)에 나타난 자살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지적하시오.(400±50자)

【논제 2】 제시문 (나)에 나타난 자살이 제시문 (가)에 나타난 자살의 유형 중 어떠한 것에 해당하는지 기술하고 그 이유를 밝히시오.(400±50자)

【논제 3】 제시문 (가)와 제시문 (라)의 도표들을 참조하여 아래 도표에 나타난 자살률 추이의 특징과 변화를 해석하시오.(800±100자)

■ 학생글

박석현·서울 상계고등학교 1학년

【논제 1】

①제시문 (가)에 따르면, 뒤르켐은 자살의 유형을 이기주의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이타적 자살로 분류했다. 이기주의적 자살은 사회적 통합과 결속이 약하기에 발생하고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적인 규제가 부족할 때, 그리고 이타적 자살은 사회적 통합이 지나치게 강할 때 발생한다고 한다.

반면에 제시문 (다)에서는 자살의 원인을 개인의 정신질환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②대다수 자살자가 우울증이나 적응장애를 겪는다는 자료와 함께 실제 사례를 제시했으며 자살 충동에 대한 조사와 전문의의 견해를 통해 정신질환이 현대인 자살의 원인임을 밝혔다.

제시문 (가)에서는 자살을 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발생하는 피동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제시문 (다)에서는 자살이 개인의 정신 건강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논제 2】

①제시문 (나)의 내용은 심청가의 한 대목으로서, 봉사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면 공양미 삼백 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심청이 자진하여 삼백 석에 제물로 바쳐지는 부분이다. 심청의 행동은 이기주의적 자살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②그 이유는 심청과 심 봉사 사이의 결속이 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부녀간의 결속이 약하다면 심청이 자진하여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노미적 자살과도 차이점을 보이는데, ③이는 심청가의 배경이 ‘효’를 중시하는 곳이기에 사회적 규범과 배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심청의 ‘자살’은 이타적 자살이라고 볼 수 있다. ④심청이라는 개인이 그 사회의 위대한 선, 즉 ‘효’를 위해 자살을 행했기 때문에 이는 위대한 선을 위한 희생이다.

【논제 3】

①제시문 (라)의 표1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비정규직 비율 추이가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표2에서는 우리나라가 1997년 IMF 이후 지속적으로 낮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실업률 또한 계속해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점차 낮아지고 있다.

②1997년 IMF 파동 직후, 우리나라에는 엄청난 경제적 파동이 발생했다.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해 길거리로 내앉았으며 기업들이 파산하거나 외국기업에 인수 또는 합병되었으며 경기는 침체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된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취했으며 도표에서 ③전년도에 비한 갑작스러운 증가가 이를 나타내 준다.

④그렇다면 도표의 2005년까지의 지속적인 자살자 수 증가는 무엇을 나타낼까? ⑤제시문 (라)의 표2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체 실업률이 감소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살자 수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는 표1의 비정규직 비율이 계속해서 높아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비록 실업률은 낮아지지만 취업자들 중에서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록 당장은 직업을 갖고 있더라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을 갖게 되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또다시 자살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⑥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자살자 수 증가는 경제적 격변뿐만이 아니라, 실업률과 비정규직 비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첨삭지도

제시문 소개 너무 길어… 심청 자살원인 설명도 빠져

【논제 1】

두 제시문 간의 인식 차이를 명확히 기술하는 것이 좋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시문의 소개에 다소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논제의 요구에 따라 ‘인식의 차’를 여러 측면에서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살의 원인과 유형화에서 큰 차이가 보임을 선명하게 밝혀야 한다.

▶ ①자살의 원인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어 있다. 핵심문장을 놓치지 않는 치밀함이 필요하다. ②다소 산만한 문장이다. 단순, 명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좋다.

【논제 2】

심청의 자살에 대한 유형 판단이 내려진 상황에서 타 유형과의 부조응을 먼저 설명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심청의 자살이 이타적 자살에 해당됨을 이타적 자살의 개념과 조건을 요약한 후, 이에 조응시켜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다.

▶ ①굳이 내용을 서술할 필요는 없다. 글의 분량이 적으므로 생략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②부녀의 결속보다 당시 전통 사회의 결속력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하다. 결속력의 정도는 그 사회의 규범에 대한 태도와 준수 여부로 확인할 수 있다. 심청의 자살은 전통사회 최고 규범인 ‘효’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행동의 사례로 당시 사회의 강한 결속력을 보여 준다. ③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적 규제의 약화를 전제로 한다. 조건에 결부시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④설명이 부족하다. 심청의 자살을 이타적 자살의 조건(㉠강한 사회적 결속력, ㉡사회의 가치>개인의 가치)에 조응시켜 설명해야 한다. 심청이 자살에 대해 가진 적극적 태도와 행동이 사회의 강한 결속력을 보여 주며, ‘자신의 행복’이라는 개인적 가치보다 ‘효’라는 사회적 가치를 우선시한 행동임을 설명해야 한다.

【논제 3】

먼저 자살률, 경제성장률, 비정규직 비율과의 관계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에서 제시문 (가)의 활용을 요구하므로 자살의 유형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런 뒤 자살률의 추이를 제시문 (라)를 이용하여 설명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학생의 답안은 제시문 (가)에 대한 활용, 자료 간의 관계, 구체적 수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우선 그래프 및 도표의 분석은 변화의 경향성을 파악하고 의미를 정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변화의 추세가 급격히 전환되는 지점을 찾아내어 이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여 기술하는 것이 좋다.

▶ ①제시문 (라)에 나타난 수치 변화에 대한 단순한 기술은 의미가 없다. 논제와 연결하여 변화의 경향성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②그래프에 나타난 1997, 1998년의 경제성장률과 비정규직의 급증을 통해 이 시기에 경제적 격변이 있었음을 기술하여야 한다. 사전적 지식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보다 제시문의 도표 분석을 통하여 설명하는 것이 출제 의도에 부합한다. ③구체적 수치를 명기해 주는 것이 좋다. “전년 대비 약 40%의 급증을 보였다”라는 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런 자살의 급증은 대부분 아노미적 자살에 해당됨을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제적 격변에 의한 가정의 해체가 급증했고 이로 인해 자살률이 높아졌을 것이라는 추론을 통해 이기적 자살도 늘었음을 기술하는 것이 더 치밀한 분석이다. ④반문하는 형식보다 직설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좋다. ⑤, ⑥자살률의 추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했고 그에 대한 분석 또한 단순하다. 1997년의 자살률을 제외하고는 2001년까지 대체로 균일하며 그 이후는 자살률이 급증했다. 그런데 경제적 격변이 있었던 1998년의 자살률은 예년 수준이다. 이런 시기가 변화의 추세가 급격히 전환된 때이므로 이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1998년의 낮은 자살률의 분석이 난해하다. 이는 1997년 때의 경제적 격변에 대한 반응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즉, 경제적 격변을 극복하고자 하는 국민적 노력이 사회적 통합력을 높여서 자살률을 낮추었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2001년 이후의 자살률 급증은 청년, 노년층의 비정규직 비율 급증과 이에 따른 이들 계층의 높은 자살률로 인한 것이라는 설명이 적절하다.

논제 분석

이번 논제는 연세대 유형이며 자살에 대한 사회적 접근과 관련 논의를 통해 수험생의 이해력과 분석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도표와 통계 해석을 요구하는 문항을 통하여 수치 변화의 사회적 요인 및 환경적 변인을 읽어내는 능력, 즉 논리적 해석력과 추론능력을 평가하고자 했다.

【논제 1】 자살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어떠한 측면에서 설명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제시문 (가)는 자살이 사회 병리 현상임을 밝히는 사회학적 연구와 인식을, 제시문 (다)는 자살이 정신질환으로부터 기인하는,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이며 우발적인 현상이라는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자살의 원인, 자살의 유형화라는 측면에서 인식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논제 2】 심청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를 생각한다면 쉽게 그 유형을 골라낼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선택된 유형에 요구되는 조건, 즉 자살 이유와 사회적 통합력, 규범 간의 연관관계를 심청의 자살과 어떻게 논리적으로 조응시켜 설명하는가에 있다.

【논제 3】 제시문 (라)의 도표와 논제에 주어진 도표를 논리적으로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 관건이다. 자살률, 경제성장률, 비정규직 비율과의 관계를 파악한 뒤, 분석 대상의 자살이 어떠한 유형인지를 밝히고 그 추이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사용하여 세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연령별로 분류된 비정규직 비율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하여 자살률과의 연관성과 그 의미를 분석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살률이 사회 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연동되므로 연도별로, 순차적으로 설명해 나가는 것이 좋다.

제시문 분석

(가)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 사회학’에 실린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소개 글로서, 출제 의도에 맞게 일부 수정하였다. 뒤르켐이 자살을 하나의 사회 병리 현상으로 보고, 사회적 관점에서 유형화한 것을 소개하고 있다. 자살이 사회공동체 내의 통합과 규제의 강약에 따라 이기주의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이타적 자살로 유형화되며 한 사회에서의 자살은 그 사회 고유의 일관된 사회적 압력에 의해 시대에 따라 일정한 유형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 ‘심청가’의 일부로 신재효 본(本)이다. 제시문의 전반부는 심청이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뱃사람들에게 자신을 제수로 팔며 그 대가로 삼백 석의 시주를 청하는 장면을, 후반부는 아비와 뱃사람들을 축원하며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다) 2007년도 신문기사를 출제 의도에 부합하도록 수정하였다. 산후 우울증으로 자살한 주부의 사례와 높은 자살 충동, 특히 청소년층의 자살 충동을 소개하면서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이 자살에 이르는 가장 주요한 원인임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자살을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서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과 보건 정책을 비롯한 사회 시스템의 재정비를 주문하고 있다.

(라) [표1] ‘한국의 연령대별 비정규직 비율 추이’는 논제에 부합하도록 가상의 수치를 입력한 것이다. 통계청과 사회단체 등에서 발표하는 비정규직 관련 통계자료의 편차가 매우 커, 부득이하게 가상의 통계치를 사용하였다. [표2] ‘한국의 경제성장률 및 실업률’은 통계청 발표 자료를 사용하였는데 일부 수치(1992∼1996년의 청년실업률)는 추정치다. 제시문 (라)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우선, 1997, 1998년의 경제적 격변(외환위기)이다. 1997, 1998년의 마이너스 성장률, 비정규직 비율로 추론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저성장 고실업의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 이후의 일정하고 낮은 수준의 경제성장률과 일정하고 높은 수준의 실업률 추이가 이를 설명한다.

이양기 학림논술연구소 상임연구원

■ 다음 주 논제

※ 다음 제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논제 1] 제시문 (가)를 요약하시오.(300±50자)

[논제 2] 제시문 (나)의 견해를 바탕으로 제시문 (다)를 해석하시오.(500±100자)

[논제 3] 제시문 (가)를 바탕으로 제시문 (다)의 견해를 비판하시오.(800±100자) (단

예상되는 반론에 재반론을 하는 형식을 취할 것)

(가) 성경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느 날 야훼로부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100세가 넘은 노파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다시 거두어가는 것은 또 무슨 변덕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순종한다. 제 손을 잡고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아비에게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 근데 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지요?” 아들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높이 치켜든다. 순간 하늘에서 신의 음성이 들려와 그를 만류한다. 정말로 산 사람을 제물로 받으려 한 게 아니라, 그저 그의 믿음을 시험하려 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 일화는 사람을 바치는 인신공희가 짐승을 바치는 희생양 제의로 바뀌는 시대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을 제지한 야훼는 그에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그때 아브라함의 눈에 저쪽에 있는 가시덤불에 양이 한 마리 걸려 버둥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따라 아들 대신 그 양을 제단에 바치게 된다. 물론 이 일화에서는 이삭이 아비에게 양이 어디 있냐고 묻지만, 그것은 인간 대신 짐승을 바치는 것이 널리 관행이 된 이후에 그 이야기에 첨가된 요소일 게다. 인류 문화의 특정단계에서 인간은 신에게 사람을 바치는 대신 짐승을 바치게 되었고, 그 희생양 제의 자체는 나름대로는 ‘문명화’의 결과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신의 제단에 산 짐승을 바치는 관습은 사라졌다. 세계의 대부분은 이미 서구적 문명화의 세례를 받아, 어떤 종교집단에서 산 짐승을 죽이는 의식을 한다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명화되었다는 서구의 일각에도 부분적으로나마 희생양 제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몇 년 전에 독일의 텔레비전에서 게르만 민속종교의 맥을 이으려는 사람들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칼로 산 닭의 모가지를 치니, 놀랍게도 목이 달아난 닭이 여전히 두발로 퍼득거리며 걸어 다닌다. 대부분 우익단체의 회원인 이들은 독일 정신의 근원을 찾아 게르만족의 민족전통을 되살리려 그런 종교의식을 행한다고 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일군의 이라크인들이 칼로 산양(羊)의 멱을 따는 장면을 보았다. 하얀 털을 적시며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는 솔직히 끔찍하게 여겨졌다. 이른바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는 사회의 눈에는 이런 잔혹한 관행이 야만적으로 비칠 수 있다. ‘문명화’의 본질 중 하나는 공공장소에서 잔혹함의 현시를 금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나 알량한 일인가? 그 문명화된 사회라고 양들로 하여금 수명대로 다 살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내가 유학 시절 학생식당에서 받아먹던 사료(?)에는 분명히 양고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걸로 보아 그들 역시 양을 도축함에 틀림없다. 다만 그 도살장면을 공개하지 않는 것뿐이리라.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라 부른다. 우리 개고기 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불여우(佛女優) 바르도 여사가 우연히 이것을 본 모양이다. 이 사실을 들어 그는 이슬람교도들이 무슨 야만인이나 되는 양 몰아붙였다고 한다. 물론 개를 도축하거나, 양을 공개적으로 살해하는 것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히 동물애호가들의 경우에는 이런 관습에 윤리적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여, 그 사랑을 생명이 가진 모든 것에 확장하려다 보니 그런 문제 제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브리지트 바르도 여사는 과연 이런 사람들 축에 속하는가? 그럴 리 없다. 이제 자랑할 거라고는 피부색밖에 안 남은 이 정신 나간 여인의 각별한 동물사랑은 지독한 인간혐오를 위한 변명일 뿐이다. 언젠가 터키와 이라크에서 핍박을 받던 어느 쿠르드족이 서방 기자들에게 울부짖던 말이 생각난다. “당신들이 개에게 보여주는 관심의 10분의 1만이라도 우리에게 보여달라.” 바르도 여사를 보면, 산정의 별장에서 사랑하는 개와 다정하게 노닐던 히틀러가 생각난다. 그 지극한 개 사랑의 10분의 1만이라도 유대인에게 나눠줬다면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없었을 게다. 어쨌든 툭하면 인종주의 발언을 하여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극우파 바르도 여사께서는, 내가 정보를 드렸으니, 당신 사상의 원조인 게르만 용사들이 독일에서 행하는 그 끔찍한 닭 살해의 관행에 대해서도 독설을 퍼부어 주시기 바란다. 피부색 같다고 봐주지 말고…. [문화평론가 진중권의 글]

(나) 우리가 인간인 이상 편견을 안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동물의 일종임에는 틀림없으며, 따라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약점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우리는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며 의무를 이행하는 동안 어느덧 편견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편견에서 벗어날 수가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자신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이성적 존재다’로 자처해 보기도 한다. (중략) 그리하여 때로는 그토록 미워하던 사람들에게도 매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손을 내밀어 어느 정도 사랑의 온정을 베풀기도 하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남에게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나의 행복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한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이성의 눈으로 인생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간은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분명히 이성적 판단의 기능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감정적 충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고 또 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편견을 줄이는 일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나만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진실이 아닐 뿐 아니라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이미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그것을 포용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때 나 자신의 편견에 대한 연민은 다른 사람에게로 자연스럽게 파급되어 갈 수 있다.[‘편견에 관하여’·염종석]

(다) 문화적 적의 이미지는 인류사 전체를 거슬러 올라가서도 확인된다. 오늘날 서양인에게 비친 동양의 모습은 과거 그리스인의 눈에 비친 스키타이인이나, 로마인의 눈에 비친 게르만족의 모습과 유사하다.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는 자신의 고유문화가 곧 중심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적 중세 유럽은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며 신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믿었다. 중국인들은 세계의 ‘중심제국’이 아시아에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중국의 황제는 인간 문화의 최고 단계를 구현했다. 그의 제국은 중국인들에겐 세계의 중심으로 통했으며, 몽골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굴복시킴으로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포르투갈인이나 영국 같은 섬나라 국민들은 자신들이 문명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공물(무역관계를 허락한 데 대한 답례로 주어졌던 금품)을 받으려 했다. 인종 중심적 세계관은 수많은 민족들의 자기묘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춤추는 문화’·브라이덴바흐, 추크리글]

김종두 학림논술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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