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씨, 5·18 때 軍자위권 발동 강조

  • 입력 2007년 7월 25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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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군의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고 신군부가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위해 북한 남침설을 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군 과거사위)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군 내부 자료 등 14만여 쪽과 당시 군 관계자를 조사해 이 같은 내용이 담긴 ‘12·12, 5·17, 5·18사건,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24일 발표했다.

군 과거사위는 이 결과를 토대로 앞으로 헌법 개정시 5·18민주화운동의 희생과 역사적 의미를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고, 12·12쿠데타 관련자 전원에 대한 서훈 박탈 등을 정부에 건의했다.

▽‘전 각하, 군 자위권 발동 강조’=수기(手記)로 작성된 보안사의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문서에 ‘전 각하(全 閣下): 초병에 대해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적혀 있다는 것. 이 회의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발포권자는 확인 못해=군 과거사위는 5월 21일 전남도청 진압 과정의 발포를 명령한 문서와 명령체계를 설명해줄 군 관계자의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군 과거사위 관계자는 “발포 명령자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실명을 보고서에 명기하지 못했다”며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그 이름을 명기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이 있었다”고 말했다.

최초 발포 시기와 관련해 군 과거사위는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전인 5월 19일과 20일에도 3공수와 11공수부대가 광주 계림동과 광주역에서 각각 시위진압을 하다 발포해 민간인을 살상했지만 상부에 보고하지 않거나 피해를 축소하는 등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재확인된 잔인한 시위 진압=군 과거사위는 공수부대원들이 시위 진압에 대검을 사용한 사실을 확인했지만 착검 명령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5월 23일 발생한 광주 지원동 미니버스 총격사건을 중점 조사한 결과 계엄군이 살아남은 부상자 2명을 야산으로 끌고 가 사살한 사실을 확인하고 5월 22일 술에 취한 공수부대원이 헬기로 연행한 시위대의 귀를 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당시 군 관계자의 증언도 확보했다.

▽보안사의 ‘청명계획’=보안사가 1989년 상반기에 계엄령이 발동될 것에 대비해 사회 주요인사 923명을 A∼C등급으로 분류한 뒤 동향 파악과 검거 및 처벌계획을 담은 ‘청명계획’을 추진한 사실이 관련 문서철을 통해 확인됐다.

결정적 장애 인물로 분류된 A급 인사는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당시 평화민주당 의원) 전 국무총리, 임종석(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의원 등 104명, 장애 인물로 파악한 B급 인사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 강만길 전 상지대 교수, 박원순 변호사 등 315명이었다. C급은 김수환 추기경과 김승훈 신부, 박형규 목사 등 499명.

군 과거사위는 “일제강점기 예비검속의 성격을 띤 청명계획이 시행되진 않았지만 이후 보안사 민간사찰의 토대가 됐다”면서 “조사 과정에서 1311명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일명 청수계획)의 자료가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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