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늑장수사 비웃은 ‘그놈 목소리’

  • 입력 2007년 3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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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점짜리 친구야 어디 갔니… 유괴된 지 나흘 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인천 M초등학교 2학년 박모 군의 책상에 조화와 함께 받아쓰기장이 놓여 있다. 또박또박하게 써 내려간 박 군의 글씨가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100점짜리 친구야 어디 갔니… 유괴된 지 나흘 만에 숨진 채 발견된 인천 M초등학교 2학년 박모 군의 책상에 조화와 함께 받아쓰기장이 놓여 있다. 또박또박하게 써 내려간 박 군의 글씨가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인천의 한 초등학생이 유괴된 지 나흘 만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유괴범은 빚에 쪼들리던 20대 가장이었다. 유괴범은 수사본부 반경 500m 안에서 협박 전화를 걸고도 수사망을 피해 가 경찰의 대처가 초동단계부터 미흡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숨진 뒤에도 협박전화=인천 연수경찰서는 연수구 송도동 M초교 2학년 박모(8) 군을 유괴한 뒤 살해한 혐의로 견인차 운전사 이모(28) 씨를 붙잡아 조사 중이라고 15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11일 오후 1시 반경 송도동 K아파트 상가 앞에서 장난감을 사러 가던 박 군에게 “S고교 가는 길을 잘 모르니 알려 달라”며 견인차에 태워 유괴했다.

이 씨는 박 군에게 부모의 직업과 집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오후 2시 반경 포장용 테이프로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은 뒤 차량 뒷좌석에 태워 인근 남동구 남동공단 일대 등을 돌아다녔다.

이어 오후 2시 45분경 남동공단의 공중전화로 박 군의 집에 전화를 걸어 “현금 1억3000만 원을 준비하라”고 협박한 것을 시작으로 13일 낮 12시까지 모두 16차례에 걸쳐 협박전화를 걸었다.

이 씨는 11일 오후 11시 반경 경기 부천시에서 인천으로 이동하던 중 박 군이 숨진 것을 발견하고, 12일 0시 10분경 남동구 고잔동 한 유수지에 시신을 버렸다.

박 군이 숨진 상태인 이튿날에도 이 씨는 박 군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 보고 싶어요. 아빠, 나 집에 데려다 준대”라고 말한 박 군의 목소리를 들려줬으나 이는 숨지기 전 녹음한 것이었다.

▽“빚 때문에…”=전과 3범인 이 씨는 차량 견인 사업에 실패하고, 사채를 빌려 유흥비로 사용하며 모두 1억3000만 원의 빚을 졌다. 9일 부인(31)과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툰 이 씨는 빚을 한 번에 갚기 위해 유괴를 계획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이 씨는 “아파트 값이 치솟은 송도동에 부자가 많을 것 같아 이 일대를 돌아다니며 초등학생 4, 5명에게 길을 물었으나 박 군만 순순히 견인차에 탔다”고 진술했다.

박 군은 고등학교 교사인 아버지(45)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43) 사이의 외아들로 누나(12)가 있다.

경찰 조사 결과 11개월 된 딸을 둔 유괴범 이 씨는 연수구 연수동에 24평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나 집을 담보로 1억 원을 대출받아 사용한 뒤 생활고에 시달려 왔다.

▽경찰의 늑장 대응, 부실한 수사=이 씨가 박 군 집에 처음 전화를 걸어 유괴 사실을 알린 것은 11일 오후 2시 45분경.

하지만 경찰은 사건 발생 후 인천시내 6개 경찰서의 형사 인력만 투입해 수사에 나섰다. 박 군 부모에게 걸려 오는 전화의 감청과 위치 추적에 나선 것은 첫 협박전화 후 6시간쯤 지난 오후 8시 29분경의 5번째 전화부터였다.

13일에는 수사본부가 차려진 연수경찰서에서 500m 떨어진 장소 등에서 협박전화를 걸었지만 경찰은 검거에 실패했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이 일요일에 발생해 초동단계에서 대규모로 일제 검문검색 등을 하지 못했다”며 “감청영장을 발부받고도 통신회사의 협조를 얻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해명했다.

한편 빈소가 차려진 인천적십자병원 영안실에서 박 군 어머니는 “아들의 영정을 차마 볼 수 없으니 치워라” 하고 오열하다 끝내 실신했다. 박 군 아버지는 한 언론에 “아들이 유괴된 나흘 동안 유괴범의 협박전화를 받으면서 범행 과정이 얼마 전 상영된 영화 ‘그놈 목소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우리 아이가 사악한 모방 범죄의 희생양이 됐다”고 밝혔다.

인천=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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