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숨바꼭질…범청학련 의장 국보법 위반혐의 장기 수배

  • 입력 2006년 7월 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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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후 10시 반 서울 청량리역 근처 PC방.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서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남측본부 윤기진(32) 의장을 만난 부인 황선(32) 씨는 늘 그렇듯이 마음은 들떴지만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윤 씨가 8년째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다니다 보니 남편을 은밀히 만날 때 주변을 살피는 것이 습관이 됐다.

한적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윤 씨가 앞서 PC방을 나섰다. 뒤따라 황 씨가 건물 계단을 내려갈 때 양복바지에 셔츠를 입은 40대 남자가 윤 씨와 황 씨를 주시하며 계단을 올라왔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황 씨는 그가 자신을 지나쳐 몇 계단을 더 올라간 뒤 자신들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눈치 챘다.

황 씨가 나지막이 “여보” 하고 남편 윤 씨를 불러 세웠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챈 윤 씨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바로 계단 위의 40대 남자가 윤 씨를 뒤쫓았고 건물 밖에 있던 비슷한 옷차림의 3, 4명도 윤 씨를 잡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황 씨도 함께 뜀박질을 하면서 맨 마지막으로 쫓아가는 남자에게 “당신들 누구야” 하고 외쳤지만 이들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행여나 남편이 붙잡혔을까봐 마음을 졸이던 황 씨는 1시간쯤 지나 “무사하다”는 윤 씨의 전화를 받았다.

윤 씨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추격전을 벌인 이들은 서울지방경찰청 보안과의 윤 씨 전담 추적팀이었다.

황 씨는 “만나기 1시간 전에 남편과 통화를 했고 우리가 만나자마자 경찰이 나타난 것으로 미뤄 전화통화 내용을 감청한 뒤 나를 미행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단둘이 만났을 때 경찰이 덮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경찰은 “윤 씨에 대해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쫓고 있다”고 말했지만 어떤 경위를 통해 두 사람의 만남을 알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경찰뿐만 아니라 국가정보원도 윤 씨를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씨는 1998년 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의장을 맡으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된 뒤 8년째 장기 도피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2000년 범청학련 남측본부 부의장을 거쳐 2002년부터 의장으로 활동하며 이른바 ‘운동권’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다. 범청학련 남측본부는 1993년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다.

수배 중이던 2004년 2월 윤 씨와 결혼한 황 씨는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다 ‘통일둥이’라 불리는 딸 겨레를 낳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황 씨는 통일연대 대변인을 거쳐 지금은 민주노동당 대변인실에서 일하고 있다.

수사기관의 한 관계자는 “윤 씨가 워낙 위장을 잘하고 도망을 다녀 잡기가 쉽지 않다”며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윤 씨처럼 정치범으로 도피 중인 사람이 수십 명은 된다”고 밝혔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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