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 게놈의 염기서열은 민간기업과 국제 공동연구팀 간의 치열한 경쟁의 결과로 이미 2000년에 그 실체가 공표됐다. 하지만 그 염기서열이 과연 신체 내에서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는 게 별로 없다. 저자는 염기서열 해독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그 다음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즉 유전자 기능에 관한 책을 쓴 것이다.
만일 같은 주제에 대해 웬만한 유전학자가 책을 썼다면 틀림없이 아주 딱딱한 논문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리들리는 탁월한 과학해설가답게 유전학 책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 냈다. 그는 정확한 유전학 정보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얻기까지 과학자들이 펼친 지난한 연구과정, 그것에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슨 유전자’를 발견했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입체적으로 엮어 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최근의 유전학적 성과들을 잘 전달하려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을 절대로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다. ‘뉴욕타임스’가 2000년에 선정한 최고의 책 10권 중에 이 ‘과학책’이 당당히 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 독자들도 벽에다 대고 설교하는 듯한 과학책을 붙잡고 하품을 참고 줄을 쳐 가며 책장을 넘기지는 않는다. 그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마찬가지다. 23쌍의 염색체 각각에 별명을 붙여 주고 그 별명을 얻게 된 과정을 역사, 철학, 심리학으로 덧입힌 이 책은 ‘23장에 담긴 인간의 자서전’이라는 부제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과학적 게놈을 인문학적 스토리로 멋지게 포장했다. 과학 저술의 좋은 본보기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7번 염색체 위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발음과 문법 능력에 영향을 주는 FOXP2 유전자처럼 2000년 이후 발견된 유전자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리들리는 ‘게놈: 시즌 2’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그에게만 맡기지 말고 아예 독자 스스로가 매체들을 활용해 그 부분을 채워 보는 것은 어떨까? 생물학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그런 숙제를 내도 멋질 것이다.
우리는 이제 유전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유전자, 게놈이 뭔데 그리 난리야. 그런 걸 꼭 알아야 돼?’라고 용감하게 떠들던 시대는 이제 갔다. 자신의 교양 없음을 자랑하고 싶지 않다면 바로 이 책부터 펼쳐 보자.
장대익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학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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