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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3월 10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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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석(鄭飛石) 씨의 소설 ‘자유부인’이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됐다. 대학교수 부부의 일탈과 애정행각을 다룬 이 소설은 춤바람 등 전후 세태를 잘 묘사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연재기간에 벌어진 지상 논쟁으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황산덕 서울대 교수가 그해 3월 1일자 대학신문을 통해 ‘대학교수를 모욕했다’고 비난하면서 논쟁이 시작됐다.
3월 11일 작가인 정 씨가 서울신문에 ‘탈선적 시비를 박함’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창작의 자유, 대중매체의 선정성 등을 둘러싼 논쟁으로 발전했다.
정 씨는 “(황 교수의 비난은) 문학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개인적 흥분”이라고 비판했다.
황 교수는 3일 후 “문학정신 없이 성적 흥분을 돋우는 표현은 문학이 아니다”며 “인기욕 때문에 저속한 작문을 쓰는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정 씨를 비난했다.
이어 변호사 홍순엽 씨와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논쟁에 뛰어들었다.
홍 씨는 21일 서울신문을 통해 “작가는 양식이 명하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붓대를 구사할 수 있다”며 정 씨를 옹호했다.
백 씨는 29일 대학신문을 통해 “신문소설은 후진적인 대중 취미에 신경을 쓰느라 저속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작가의 문학정신을 독자가 이해했든 않았든 간에 이 소설이 ‘대중 취미’를 만족시킨 것은 분명하다. 연재 후 나온 자유부인 단행본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1956년부터 1990년까지 6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윤리 기준도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일면식도 없던 정 씨와 논쟁 이후 가까워졌다는 황 교수는 11년 뒤인 1965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닭 쫓던 개 모양으로 정 씨와 나는 아연실색하고 있다. 우리가 허심탄회한 기분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사회의 되어가는 꼴에 대해 허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40년이 지났다.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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