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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5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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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종 다언어 다종교의 땅 인도. 그러나 그곳에서도 지폐는 마하트마 간디가 인쇄된 것만이 통용된다. 그는 인도의 ‘바푸(아버지)’요, ‘인도적(印度的)인 것의 총화’인 까닭이다.
성서와 불경의 가르침에서 비폭력(非暴力)은 낯선 것이 아니지만, 오로지 진리의 힘으로 ‘역사의 칼날’을 쥐었던 근대적 인간은 그가 유일하다.
이 위대한 영혼이 있었기에 20세기를 전후한 야만과 광기의 시대는 ‘증오를 넘어선’ 민족주의운동이라는 희귀한 역사적 사건을 목격할 수 있었다.
1930년 4월 6일. 인도 서부 던디 해변은 간디와 그를 따르는 수천명의 인도인들로 까맣게 뒤덮였다. 영국 식민당국의 염세(鹽稅)부과에 맞서 직접 소금을 만들고자 바닷가로 몰려왔다.
350km에 이르는 ‘소금 행진’은 고단했다. 무수한 곤봉세례가 쏟아졌지만 이들은 팔 한 번 들지 않고, 아무 저항 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갈 뿐이었다. 영국 경찰은 소금밭을 진흙으로 뭉개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사티아그라하(진리투쟁)! 아힘사(비폭력)! 그것은 ‘정복자’ 영국에 대한 도도하고 신랄한 저항이었다. 간디는 참으로 위험하고 불편한 적(敵)이었다.
하나, 위대한 성자(聖者)의 발자국에 이슬만 고이는 게 아니다. 간디에게서 그 신성(神性)의 두루마기가 벗겨졌을 때 ‘인간’ 간디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차라리 안도한다(?).
37세에 금욕을 선언한 뒤 정욕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한다든지, 집에서는 독선적이었으나 밖에서는 매우 정치적이었다든지.
간디를 암살한 힌두민족주의자 나투람 고드세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간디는) 진리와 비폭력의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오직 그만이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절대적 재판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간디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믿지 않았다. 그의 위대함은 선(善)과 악(惡)을 ‘다른 얼굴의 하나’, 바로 자기 자신으로 본 데 있었다.
“내 안에 간디와 히틀러가 함께 있다!”(마더 테레사)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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