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효종/'고백성사' 또 한번의 기회

  • 입력 2003년 10월 9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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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비자금에 대한 검찰수사가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확대되고 있어 정치권에 한바탕 태풍이 불 조짐이다. 이런 보도를 보면 불법을 응징한다는 통쾌함보다는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3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맴돌아야 하는가’하는 자조감과 착잡한 소회가 든다.

대선이 끝나기만 하면 한번은 치러야 할 ‘빚잔치’와 같은 검찰조사라는 통과의례는 국민 모두를 우울하게 만든다.

▼정치자금 ‘음모론’ 변명 지겨워▼

이 3류 정치에는 거대 야당의 책임도 크다.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은 야당답지 않은 야당, 기득권 정당의 행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나라당은 이번 검찰 조사에 대해서도 ‘전가의 보도’처럼 정치적 음모론을 들먹이며 발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번 기회에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며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을 결의를 다져야 한다. 사실을 얼버무리는 무책임한 태도야말로 지난번 대선 패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국정책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은 주변 인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불법 정치자금 수사대상에 올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다른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이상하게도 한국사회에서는 정권을 잡으면 그 순간부터 과거 행적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 ‘산소 같은 정부’나 ‘무공해 정권’으로 자처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그러한 경향은 노무현 정부에서 유별났다.

낡은 정치의 틀을 깨겠다고 공언했던 노 대통령과 민주당은 돼지저금통으로 선거자금을 충당하고 돈 안 드는 인터넷선거운동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선거를 치렀다고 강변해 왔다. ‘굿모닝시티’ 사건의 와중에서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민주당은 선거자금 총액을 공개했지만 결과는 개운치 않았다. ‘진정한’ 고백성사라기보다는 ‘무늬만 고백성사’라는 혹평을 받았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깨끗한 정치자금 모금의 상징이던 ‘돼지저금통 신화’는 상당 부분 위선임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오히려 소풍간 돼지 수를 세다가 정작 자신은 빼놓고 다른 돼지만을 세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우화가 생각난다.

대통령총무비서관을 지낸 최도술씨가 검찰에 의해 소환 통보를 받았고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이 한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황에서 또 앞으로 어떤 의혹이 고구마 넝쿨처럼 돌출할지 모른다. 이러한 혐의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마치 흙탕물 위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낡은 정치풍토에서 태어난 깨끗한 정부를 자부해 온 노무현 정부가 입게 될 도덕성의 흠집은 치명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화려한 은박지로 감쌌던 ‘냄새나는 생선’의 실체가 노출됐을 때의 충격을 상상해 보라.

도덕성은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자본이다. 이는 신선한 느낌도 줬지만 그에 못지않게 독선적 국정운영의 버팀목 노릇을 한 것도 사실이다. 소수정권이면서도 여론의 비판에 아랑곳 하지 않고 국민의 ‘눈높이 인사’보다 ‘코드 인사’를 고집하면서 오히려 주류층의 부도덕성을 끊임없이 제기해 온 것도 ‘우리는 기존의 정권과 다르다’는 도덕적 자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법 선거자금 수수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정치나 경제개혁을 한다고 나설 때마다 “남의 눈 속의 티끌을 보기 전에 자신의 눈 속의 들보를 먼저 생각하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것이 분명하다.

▼진정한 정치개혁 첫걸음 되길▼

노무현 정부는 ‘토론공화국’을 말하면서 참여민주주의를 활성화하겠다고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이것들이 실현되려면 먼저 펀더멘털이 튼튼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라는 정치적 구태가 그 뿌리에 여전히 있다면 새로운 잎이 솟아나고 열매가 맺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일 뿐이다.

노무현 정부는 물론 한나라당도 이번 의혹에 대해 도마뱀 꼬리 자르기나 음모론과 같은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대응하기보다 진실한 참회와 반성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정치개혁의 첫걸음을 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여야 정치권이 음성적 정치자금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며 감추기에 급급했던 이전의 정치 행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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