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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13일 11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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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법부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국민에게 실망과 아쉬움만을 안겨 온 지가 오래 되었다. 사회가 발전하고 민주화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불합리하고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하나씩 개선되어 갈 때에도 우리 사법부는 이렇다할 변신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구태의연한 과거의 모습 그대로를 고집스럽게 유지해 왔다.
그리하여 근래 십수년 사이에 몇 차례 우리 사회 전체가 크게 개혁과 도약을 이루는 전환의 계기를 맞았을 때에도 우리 사법부는 외부의 흐름에 밀려 마지못하여 변신의 흉내만을 내었을 뿐 그 속내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채 과거 암울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대 사법의 기본 구조를 지금 이 시점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아쉬움과 실망을 넘어 분노와 절망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엇고 사법 개혁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이제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큰 물결이 되어 사법부를 옥죄고 있다.
한편으로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우리 법관들 역시 어떨 때는 기대와 희망에 가슴 부풀어 하며, 어떨 때는 좌절과 절망에 비통해 하며 사법부의 진정한 개혁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다시 한번 변화와 개혁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으며, 때마침 새로운 대법관 선임을 앞두고 온 국민과 법관들은 이번의 대법관 선임이 사법부 변신의 큰 계기가 될 것을 기대와 설렘 속에 지켜보아 왔다.
그런데 최근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새 대법관 선임의 내용은 종전과 아무런 차이점이 없이 지금까지의 기준과 방식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법부의 변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국민과 법관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며, 시대의 엄숙한 요구에 대한 중대한 외면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법원 안팎의 법조인은 물론 온 국민과 각종 사회단체에서 하나같이 새 대법관은 완전히 새로운 기준과 방식으로 선임되어야 함을 외쳤고, 대다수의 국민과 법관들은 이번의 대법관 선임은 완전히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새로운 방식과 기준에 의하여 선임될 것이라는 강한 기대 속에 대법관 선임 절차를 기다려 왔다.
그러나 이제 그 기대를 철저히 저버릴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하여 나는 허탈감과 참담함에 몸이 떨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든 결과에 대하여는 18여 년간 사법부에 법관으로 몸담아 온 나 자신 역시 그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그 동안의 비겁한 타협과 안일한 외면, 무책임한 침묵에 대하여 자괴심과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여 나는 그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을 짐지는 한 방법으로 지금껏 붙잡고 있던 나의 법관직을 내놓고자 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제물이 새롭고 자랑스런 사법부의 탄생에 작은 밑거름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또한 지금 사법부의 부끄러운 모습에 크게 또는 작게 책임을 함께 져야할 우리 모든 법관들에게서 각자의 몫에 상응하는 반성과 고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200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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