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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4월 10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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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취업전쟁터〓10일 오전 서울 연세대 중앙도서관. 시험철도 아닌데 빈자리 하나 없이 빽빽했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책은 대부분 취업 관련 경영학 서적이나 고시 준비를 위한 법률서적.
이 학교 사회학과 4학년생인 전현무씨(27)는 “경제가 안 좋다는 말이 나오면서 같은 과 친구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번져가고 있다”며 “도서관에 앉아 있어야 마음이라도 놓인다”고 털어놓았다.
요즘은 ‘졸업이 곧 실업’이다.
지난해 초 서울시내 모 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신현수씨(25)는 이제까지 원서를 넣은 곳이 150군데가 넘는다. 이 가운데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 곳은 30여곳이었지만 경력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번번이 돌아서야 했다. 할 수 없이 올해 초 방송 관련 전문학원에 ‘재입학’했다. 신씨는 “여학생은 졸업 즉시 취업하는 학생이 손에 꼽을 정도”라면서 “한두 학기씩 졸업을 늦추거나 학원에 다니면서 다시 기회를 엿보는 ‘캥거루족(族)’이 주변에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서울 K대 상대의 지난해 졸업생은 110명. 일자리를 찾기 시작한 지 넉 달이 다 돼 가는데 일자리를 얻은 졸업생은 60명 정도에 그쳤다. 나머지는 적성을 따질 것도 없이 눈높이를 낮춰 일자리를 구해야 할 처지다.
취업난이 심해질수록 인터넷에는 보다 많은 채용정보를 얻으려는 청년실업자로 넘쳐난다. 취업정보업체 인크루트(www.incruit.com) 사이트에 올라 있는 취업희망자들의 온라인 이력서는 이미 100만장을 돌파했다.
▽대기업 취업은 ‘바늘구멍’〓대기업인 LG전선은 올 1월 말 신입사원 40명을 모집했다. 이 가운데 대졸 신입사원은 고작 20명. 그런데 지원자는 1500여명이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옛날처럼 대학을 찾아다니면서 기업설명회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며 “대학 몇 군데만 의뢰해도 지원서가 수천장씩 들어온다”고 말했다.
지난해 104명의 신입사원을 뽑았던 외국계 보험회사 푸르덴셜생명은 올해 채용인원을 크게 줄였다. 1·4분기(1∼3월) 31명을 채용한 뒤 7월과 10월 각각 20명가량을 더 뽑을 예정이어서 연간 채용인원은 70명 안팎에 머물 전망이다. 푸르덴셜생명 김정은 인사팀장은 “올해는 평년 수준인데 회사 안에서 채용 시기나 규모를 좀더 ‘보수적’으로 조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밝혔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지난해 12월 신입 및 경력사원 700명을 선발했다. 지원자 2만5752명 중 박사가 104명, 석사가 3167명이나 됐다. 미국 경영학석사(MBA)학위 소지자 등 해외유학파도 413명이나 지원했다. 현대차 인사팀 관계자는 “요즘 지원자들은 토익 900점은 기본이고 회사의 눈길을 끌 만한 다른 능력들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취업경쟁이 치열해졌다는 뜻이다.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기업의 활력’〓일자리가 불안정한 청년실업은 폭력, 한탕주의, 신용불량자 양산 등 사회문제로 직결된다. 하지만 청년실업의 부작용은 경제분야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청년실업이 높다는 것은 국가경쟁력의 핵심인 인적 자본을 효율적으로 ‘양성’하지도 ‘활용’하지도 못한다는 뜻.
‘청년 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는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문제점을 해소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부(富)와 고용창출의 핵심주역인 기업들의 기(氣)를 살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상우 연구원은 “경제가 계속 성장해야 전체 일자리가 늘어나고 그 가운데 청년층 신규 고용도 창출된다”며 “기업이 적극 투자에 나설 수 있게 정부가 정책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기업활동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정부 대책은 '미봉책'…경기-채용시스템 변화 못따라가▼
정부는 청년층 실업 문제를 풀기 위해 직업훈련, 청소년 직장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심각한 청년실업은 전반적인 불경기에다 기업의 인사시스템 변화까지 겹쳐있는 구조적인 문제다. 이 때문에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청년실업 대책은 어차피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실업대책 주무 부처인 노동부는 청년층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2374억원을 들여 18만여명의 청소년(15∼29세)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직업훈련 기회를 제공하는 등의 대책을 세워놓고 있다.
일자리 창출의 핵심은 청소년 직장체험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은 연수지원제와 취업지원제로 구성된다. 연수지원제에 참가하는 고교 대학 대학원 재학생은 최대 6개월간 매달 30만원씩을 받으며 전공과 관련한 다양한 경력을 쌓을 수 있다.
18∼30세의 미취업자는 취업지원제를 신청해 인턴으로 석달간 근무할 수 있다. 인턴사원을 채용한 기업은 매달 50만원, 연수 후 정규직원으로 고용하면 추가로 3개월분(150만원)을 지원 받는다.
일선 기업의 채용 관행이 경력자를 선호하는 쪽으로 바뀜에 따라 당장 일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즉시 전력’을 키워내는 직업훈련도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측도 이들 대책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민도 적지 않다. 전반적으로 경기가 나쁘면 바로 신규인력 수요가 줄어드는 데다 숨가쁘게 변하는 노동시장의 수요를 학교 교육이 따라잡을 수 없다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노동부 한창훈(韓昌勳) 고용정책과장은 “2005년까지 중장기 인력수급 전망시스템을 구축해 학교와 직업훈련기관이 업체가 요구하는 인재를 최대한 제때 배출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 올해 청소년 실업대책 예산 어디에 쓰이나 (자료:노동부) | ||||
| 분야 | 사업 | 예산(억원) | 대상인원(명) | 소관 부처 |
| 일자리 창출 | 청소년 직장체험 | 543 | 4만4000 | 노동부 |
| 대학생 중소벤처기업 현장체험 | 25 | 2만 | 중소기업청 | |
| 문화체험 | 75 | 1993 | 문화관광부 | |
| 정보기술인력 해외 취업연수 | 60 | 1000 | 정보통신부 | |
| 구인업체 개척 | 50.68 | 2800 | 노동부 | |
| 장기 구직자 고용촉진 | 71 | 1만1785 | ||
| 직업훈련 | 청소년 미취업자 등 직업훈련 | 800 | 5만2000 | |
| 비진학 청소년 훈련 | 600 | 8400 | ||
| 저소득 청소년 소프트웨어 기술교육 | 54 | 2만 | 정보통신부 | |
| 고학력 미취업자 전문교육 | 39 | 2000 | ||
| 문화산업 전문인력 교육 | 28 | 1975 | 문화관광부 | |
| 무역 전문인력 교육 | 7.5 | 700 | 산업자원부 | |
| 벤처인력 인큐베이터 | 8 | 2200 | ||
| 대학생 창업동아리 지원 | 13 | 1만2000 | 중소기업청 | |
▼'이력서 60통' 25세 여성 K씨▼
“대학 4년간 놀면서 지낸 것도 아니에요.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모르겠어요.”
올해 초 부산의 모 대학 통계학과를 졸업한 김민지씨(25·여)는 취업을 거의 포기한 상태다. 작년 하반기부터 30통이 넘는 이력서를 썼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지원한 것까지 포함하면 60곳이 넘는다.
온라인 접수보다는 직접 회사를 방문하는 게 낫다는 선배들의 충고에 따라 서울도 10여차례나 다녀갔다. 하지만 전부 헛걸음이었다.
“처음에는 은행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꿈을 접은 지 오래예요. 어디든 불러만 주면 가고 싶은데 이젠 그마저도 없네요.”
김씨의 하루 일과는 인터넷 검색으로 시작한다. 각종 취업 관련 사이트에서 새로 올라온 취업공고(公告)를 찾아본다. 인터넷 카페에서는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끼리 취업 관련 정보를 주고받는다. 취직한 선배들이나 교수님에게 정기적으로 전화해 안부 겸 정보를 얻는 것은 ‘필수’다.
지난달 김씨는 선배 추천으로 서울의 한 미술관에 취직하기로 했다. 전공과는 무관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최근 경기 불황 탓으로 채용계획이 백지화됐다.
김씨는 “요즘 웬만한 중소기업도 경쟁률이 수십 대 1을 넘는다”면서 “대졸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일자리 구하기가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가 유일하게 위안을 받는 곳이 있다면 작년부터 친구들끼리 모여 만든 취업 스터디 모임. 5명 중 1명을 빼고는 모두 아직 ‘실업자’다. 이젠 취업을 준비하는 모임이라기보다 서로 의지하고 달래주는 친목모임처럼 변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토익 점수가 900점대예요. 평균 학점도 B학점 이상이고요. 대학 다닐 때 과에서는 그래도 우등생 그룹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회낙제생 취급을 받고 있어요.”
김씨는 “취업난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면서 속수무책으로 기다리고 있는 게 가장 힘들다”면서 “대학 졸업장이 이처럼 부담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하소연했다.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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