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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3월 23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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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있었다면 오히려 그와 함께 살기 힘들었을 거예요. 오히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베풀 게 더 많다는 것을 배웠죠.”
힘겨운 복학 후 그는 1남3녀의 충실한 장남 역할로 돌아왔다. 마침 우리 경제는 산업화의 절정을 향해 치달았고, 그의 인생은 첫번째 전환을 맞았다. 그는 신원조회를 피할 수 있었던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 입사해 호주은행 한국법인을 세우는 데 참여한다. 이후 인도네시아에 합작은행을 설립하는 데 참여하며 동남아통이 된 그는 다시 진로그룹에 발탁돼 기조실장과 동남아본부장 등을 맡는다.
1997년 그를 태우고 정신없이 달리던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로 큰 숨을 들이쉬면서 그도 호랑이등에서 내려섰다. 훌쩍 사표를 낸 그는 인도네시아 노동부에서 진행 중이던 농촌지역 빈민직업교육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1년여 후 국내에 돌아온 그는 지천명(知天命)을 앞둔 나이에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자신의 구상과 비슷한 개념이 숙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재원확보 등의 어려움으로 사회복지학자들의 서랍 속에 박혀 있던 ‘사회연대은행’은 추진력을 얻었다.
“은행은 복권판매대행 수익의 일부를, 주유소는 기름판매 수익의 일부를 기금으로 내놓을 수 있어요. 백화점은 별도의 유통코너를 만들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삼성그룹이 사회복지공동기금을 통해 출연한 10억원을 내놓아 가장 먼저 동참했다. 10평도 안 되는 사무실에 아직 간판도 제대로 못 달았지만 연내 40억원, 5년 안에 200억원 이상을 모금한다는 것이 목표다. 정식활동은 이르면 4월경 시작하지만 벌써 문의전화가 1000통이 넘게 쏟아지고 있다.
“저희 목표는 성공이지 시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좋은 계획과 열심히 일할 자세를 갖춘 분들만 골라 창업지원사업을 펴나갈 겁니다. 저희 은행도 은행이니까요.”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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