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 전문직 ´탈세천국´]국세청 세금전쟁 허실

  • 입력 2002년 8월 30일 18시 32분


《국세청의 부동산 투기대책 발표와 장대환(張大煥) 전 국무총리서리의 탈세 의혹 제기 이후 고소득자에 대한 국세청의 세원(稅源) 관리가 또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국세청은 그동안 변호사와 의사 등에 대한 세무관리를 꾸준히 강화해 왔고 적잖은 성과를 거뒀지만 아직도 세무행정 곳곳에 허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인 변호사와 성형외과 등의 의사들은 아직도 ‘탈세 천국’에 방치돼 있어 봉급생활자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주고 있다. 국세청이 추진하고 있는 고소득자 세원관리 강화 방침과 그 한계를 살펴보고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본다.》

탈세(脫稅)를 감시하는 국세청의 ‘최대의 적(敵)’은 현금이다. 거래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현금은 흘러가는 곳마다 불법과 탈법을 싹 틔우며 결국엔 나라 살림을 좀먹기 때문이다. 국세청 직원들은 “모든 거래가 현금 대신 수표나 어음, 신용카드 등으로 이뤄진다면 일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국내 경제 현실에서는 아직까지 신용카드보다 현금을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비율이 훨씬 더 높다. 특히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변호사나 의사들이 아직도 ‘탈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몇 년째 국세청과 피 말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법률사무소나 병원 등은 최근에야 신용카드를 받기 시작해 아직도 세원(稅源)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 최근 들어 국세청에서 휘두르는 ‘조사’의 칼끝이 매서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세금전쟁의 승자는 고소득 전문직종 종사자들이라는 게 중론이다.

일반 자영업자들도 탈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이 갖는 사회적 지위와 책임감을 고려해 볼 때 투명하게 이들의 수입을 밝혀 과세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국세(國稅) 행정, 아직 갈 길이 멀다〓국세청은 지난해부터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고소득 전문직 업종을 중점관리 대상에 올려놓고 별도 관리하고 있다. 소득세 신고 전에 성실신고를 당부하는 안내장을 보낸 뒤 신고 내용을 분석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

결과적으로는 이들의 탈세를 막는 데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는 것이 국세청의 자평이다. 병원과 법률사무소들은 마지못해 신용카드를 받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의 세원이 일부 노출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세무전문가들은 “국세청이 밝혀낸 고소득 전문직종의 탈세 규모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10% 이하에 머물던 소득금액 신고 비율을 20∼30%까지 끌어올린 것일뿐 탈세 자체를 근절한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최근 국세청의 부동산투기 대책 발표내용 중 변호사 의사 부부가 합산해 연간 825만원의 소득을 신고하고도 10채가 넘는 아파트를 구입한 사례가 발견된 것도 국세 행정의 허점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지적이다.

▽신용카드 활성화가 탈세 근절의 만병통치약?〓국세청의 각종 탈세 방지대책은 근본적으로 현금결제 비율을 낮추고 신용카드 사용을 활성화하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모든 거래에 흔적이 남도록 해 세무조사를 하지 않아도 고소득자의 수입이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시스템화하겠다는 포석이다.

하지만 법률사무소나 성형외과 등의 병원은 구조적으로 현금결제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어 신용카드 권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T법무법인 K세무사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성형외과 피부과 등의 개업의사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국세청이 갈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고 말했다.

또 법률사무소도 정식으로 수임하지 않은 사건의 착수금이나 성공보수 등을 대부분 현금으로 받고 있어 국세청이 파악할 수 있는 세원은 전체의 2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세청은 세무조사 과정에서 사건의뢰인에게 안내장을 보내 실제 지불한 수임료를 질의하기도 했지만 당사자의 반발이 거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체계적인 상시(常時) 감시감독체제 구축 필요〓국세청은 국세통합정보시스템(TIS)을 통해 모든 납세자료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고소득 전문직종 종사자의 납세실적이 TIS를 통해 상시적으로 별도 관리되지는 않고 있으며 기획 조사 등의 필요가 있을 때만 표본을 추출해 조사대상자를 분류하고 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부동산 자동차 골프회원권 등 재산 변동내용과 금융 추적을 통해 세금 추징의 근거를 확보할 수는 있지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조사인력 등의 한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최명근(崔明根·조세법학) 서울시립대 교수는 “고소득자를 포함한 자영업자의 성실납세 여부를 지속적으로 체크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이 필요하다”며 “이 같은 특단의 대책 없이는 이들과 관련한 세원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금전쟁 첨병 ´TIS´▼

국세통합정보시스템(TIS)은 국세행정의 틀을 바꾼 혁명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7년 이 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이후 모든 납세정보를 통합 관리해 효율적인 세원(稅源)관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전까지는 사업장과 세목별로 개별 관리해 온 것들이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서부터는 개인별로 통합관리하는 형태로 전환됐다. 세적(稅籍), 신고, 조사, 자료, 징세, 민원 등 6개 분야의 기능도 통합돼 업무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평가.

또 세무조사를 위해 여러 가지 조건을 입력하면 의심이 가는 조사대상자가 나타난다.

세무서 직원의 지역담당제를 99년 폐지할 수 있었던 것도 TIS 덕분. 지역담당제는 납세자와 유착의 폐해가 있었지만 그 밖의 방법으로는 특정 지역의 세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필요악처럼 유지돼 왔다.

하지만 현재 수준의 TIS만으로는 탈세 근절이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수천 가지 경우의 수를 자동으로 분석해 탈세규모와 탈세의도까지 가려내기에는 시스템의 성능이 부족한 것이다.

이 때문에 국세 전문가들은 “TIS 성능을 현재 수준보다 훨씬 업그레이드해 상시적인 감시감독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어느 성형외과의사의 고백 “현금결제 환자기록 대부분 폐기…”▼

“사실 요즘 들어 부쩍 세무당국의 눈치를 봅니다. 환자들의 신용카드 결제 비율도 늘어 어쩔 수 없이 당국에 신고하는 소득규모도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바닥에서 세금 제대로 내고 영업하는 병원은 없습니다. 세무조사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평상시 소득을 적게 신고하는 것이 사업측면에서는 훨씬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운영하고 있는 병원장 A씨는 현금결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탈세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개업을 위해 막대한 빚을 얻어 투자했고 마케팅을 위해서도 비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탈세의 유혹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

“당국의 관리가 허술했던 2, 3년 전에는 소득의 10%도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형외과가 탈세의 온상처럼 비치면서 감시가 강화돼 지금은 소득의 30∼40%는 신고하고 있습니다. 환자가 많은 병원에서는 그 정도만 신고해도 성실납세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특히 성형외과를 찾는 환자의 대부분은 다른 환자나 병원 관계자의 소개를 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수술비를 조금 깎아주면서 자연스럽게 신용카드 대신 현금결제 쪽으로 유도하는 사례가 많다고 A씨는 귀띔했다.

그는 또 병원들이 탈세를 위해 현금결제한 환자들의 진료기록(차트)을 대부분 폐기한다고 실토했다.

“대부분의 성형외과에서는 현금결제 차트를 없애는 것이 일반화돼 있습니다. 세무조사가 시작되면 우선 차트부터 뒤지는데 차트가 없으면 세무조사를 해도 세금을 추징할 근거가 없어 안심할 수 있습니다. 현금결제 차트 중 보관할 필요가 있는 것은 수술을 축소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코와 눈을 동시에 수술했다면 차트에는 눈만 수술한 것으로 정리하기도 하고 점을 10개 빼는 수술을 했다면 2개만 뺐다고 적는 것이죠.”

성형외과 수술의 경우 병을 치료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병력을 관리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소개 없이 병원을 찾은 환자들이 신용카드를 내밀 경우에는 굳이 현금결제를 유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환자가 국세청에 신고할 경우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신용카드를 받는다’는 안내문구를 붙이지 않거나 신용카드 결제용 기기를 눈에 띄지 않도록 감춰 현금을 내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도 일반화돼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그는 덧붙였다.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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