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의원 발언 파문]'兵風 기획수사' 의혹 증폭

  • 입력 2002년 8월 21일 18시 55분


‘수사 착수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비리의혹을 거론해달라는 요청을 누군가로부터 받았다’는 민주당 이해찬(李海瓚) 의원의 21일 발언은 병풍(兵風) 정국에 엄청난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다.

만약 검찰 수사팀이 수사 분위기 조성을 위해 이 의원에게 수사 내용을 알려주고 대정부질문 요청을 했다면 검찰 수사의 공정성이나 민주당의 병풍 공세는 정당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즉각 민주당과 검찰의 병풍 공작 증거가 드러났다고 총공세를 퍼붓고 나섰다.

이 의원은 이날 오전 당무회의 도중에 회의장을 나와 일부 기자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던 중 “박영관(朴榮琯·서울지검 특수1부) 부장이 올해 3월 이 후보 아들 병역면제 의혹 수사를 결심했다고 하더라”며 그 배경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는 이어 ‘그 쪽에서’라는 표현과 함께 “대정부질문 같은 데서 떠들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의 발언에서도 이 의원은 ‘그 쪽’이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했다. 이 후보의 사위 최모 변호사가 김길부(金吉夫) 전 병무청장을 면회했다는 ‘그 쪽 제보’를 확인한 결과 이름 끝자가 다른 것으로 밝혀졌고 ‘그 쪽’에 “변호사가 다른 사람이더라”고 재확인을 요청하자 ‘그 쪽’에서도 “알아보니 아니더라”고 했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의원은 이날 오후 자신의 발언을 해명하는 기자간담회에서 그런 정보를 알려준 사람의 신원에 대해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다. 검찰이나 군 관계자는 아니다. 수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누구라고 얘기하면 일이 자꾸 복잡해진다”라고 말을 바꿨다.

물론 이 의원이 ‘박영관 부장’이나 ‘검찰’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당초 발언의 ‘그 쪽’은 누가 들어도 검찰측이었다.

하지만 이 의원은 4월 대정부질문에서 “이 후보 아들에게 병역시비가 일고 있다”고만 얘기하고 넘어갔다. 이 의원이 들었다는 정보의 내용이 공개된 것은 한달쯤 뒤인 5월 중순 주간 오마이뉴스 보도를 통해서였다. 한나라당은 즉각 고소고발로 대응했고, 검찰은 이달 2일 수사에 착수했다.

한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이날 대구 방문 중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의 전화보고를 받고 “(정치권과 검찰의 커넥션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서청원(徐淸源) 대표도 “우리 당은 병풍이 민주당 주도 아래 이뤄졌다고 주장해왔는데 이 의원의 발언으로 진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兵風 부메랑' 법무부-檢에 직격탄▼

민주당 이해찬(李海瓚) 의원의 병역면제 의혹수사 청탁 유도 발언이 나온 직후인 21일 오후 법무부와 서울지검 수뇌부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특히 법무부는 이날 오후 6시반 검사장급 이하 전국 검찰 인사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이 의원의 발언에 따른 여론을 파악하면서 인사 발표를 세 차례나 늦추다 결국 22일로 연기했다.

이날 오후 4시경 이 의원의 발언 내용이 알려지기 전까지 인사안에는 박영관(朴榮琯) 서울지검 특수1부장검사가 유임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검찰 관계자는 “짜인 판이 흔들리게 생겼다”며 이를 뒷받침했다.

김정길(金正吉) 법무부장관은 이 의원의 발언 내용을 전해들은 직후 검사장급 참모들을 불러 긴급회의를 열고 이 의원 발언의 진위 및 파장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검찰이 정치권과 결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에 박 부장을 다른 자리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장관은 예정대로 오후 6시반에 인사를 발표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의원 발언 파장이 일부 조간 신문의 가판(전날 저녁에 미리 나오는 신문)에 1면주요기사로 보도되고 방송도 주요 뉴스로 다루자 오후 8시경 인사 발표는 연기됐다.

검사들은 인사 발표가 연기될 때까지 이리 저리 연락을 취하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인사안의 변화 가능성 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날 오후 4시경 김진환(金振煥) 서울지검장은 김회선(金會瑄) 3차장과 박 부장을 지검장실로 불러 20분가량 회의를 열었다. 박 부장은 이 자리에서 “이 의원을 알지 못하며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김 차장은 회의를 마치고 “이 의원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경위를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의 직후 일부 검찰 간부들은 기자들에게 전화를 해 의견을 구했으며 이를 상부에 보고하는 등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대검 간부들도 이 의원의 돌출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키자 “정치인들 때문에 검찰만 또 한번 체면을 구기게 됐다”며 난감해 했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박영관 특수1부장 "이의원과 통화한적 없어"▼

서울지검 박영관(朴榮琯) 특수1부장은 21일 “민주당 이해찬(李海瓚) 의원과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전화 통화를 한 사실도 없다”며 “3월에는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몰랐고 누구에게 보고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 의원의 이야기가 굉장히 구체적인데….

“전혀 사실무근이다. 요즘 신문이나 TV 하루만 보면 그 정도는 안다.”

-평소 이 사건을 수사하고 싶어한다는 말은 있지 않았나.

“그런 적 없다.”

-노명선(盧明善) 부부장검사에게서 김길부(金吉夫) 병무청장이 병역비리 은폐 대책회의에 관해 진술했다는 보고를 받지 않았나.

“바로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 수사하고 있지 않나. 사건 얘기는 하지 말자.”

-다른 검찰 관계자가 이 의원에게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 않나.

“누구에게도 그런 보고를 한 적이 없다.”

-인지수사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수사 여부에 대해 내부 검토를 했었나.

“정치적 언급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병역면제 부분은 공소시효가 지났으나 은폐 부분은 시효가 남았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형사소송법상 보장된 검사의 수사 의무와 권한에 대한 당연한 얘기를 한 것이다.”

-법적 대응을 할 것인가.

“다른 곳으로 가면 자유롭게 하겠지만 수사팀에 있는 동안은 참을 것이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병역의혹 제기 요청 누가 했을까▼

민주당 이해찬(李海瓚) 의원이 올해 3월 검찰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을 제기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발언함에 따라 당시 수사 지휘 및 보고 라인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의원은 자신에게 직접 얘기를 전달한 사람이 검찰이나 군 관계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수사 정보 유출자’가 누구이며 ‘요청의 진원지’가 어딘가라는 의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병역비리수사본부가 해체된 3월 서울지검 특수1부의 각종 수사는 홍만표(洪滿杓) 부부장 검사-박영관(朴榮琯) 부장검사-김회선(金會瑄) 3차장-이범관(李範觀) 서울지검장으로 이어지는 지휘라인이 지휘했다.

서울지검 서부지청에서 병역비리를 수사한 노명선(盧明善) 당시 서울지검 서부지청 부부장검사는 2월 수사를 끝내고 주일 한국대사관으로 파견 나갔다. 홍 부부장검사(미국 유학 중)는 병무비리 수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대검에는 김승규(金昇圭) 차장과 이명재(李明載) 검찰총장이 서울지검의 수사 상황을 매주 한 번씩 보고 받았다.

이 같은 공식 지휘 및 보고 라인 외에도 대검의 김종빈(金鍾彬) 중앙수사부장 등 검사장들은 서울지검의 수사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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