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회비 이틀에 한번씩 낸 남자

  • 입력 2002년 2월 1일 17시 46분


대한적십자사 회원홍보과는 최근 지난해 회원들의 적십자 회비 납부 장부를 정리하다 이상한 기록을 발견했다. 한 회원이 2월에 3회, 4월에 4회, 5월에 13회…, 11월에 24회 등 지난해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무려 184회에 걸쳐 400만6700원을 낸 것.

1년에 한번, 그것도 내든 말든 상관없는 적십자회비를 이렇게 꾸준히 계속 내는 사람은 누굴까. 적십자사는 회비가 입금된 서울 마포구 J은행 성산동지점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주인공의 신원을 확인하곤 다시 한번 놀랐다.

김영일(金泳一·36)씨. 마포구 중암동 모 고시원의 1평도 채 안 되는 월 9만원짜리 방에 살면서 공공근로로 받는 하루 2만7000원이 소득의 전부였다.

“자꾸 적십자사 쪽에서 저보고 ‘선생님’ 하면서 한번 만나자고 해요. 그러면 도움을 끊겠다고 했는데….”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수염이 턱과 코밑에 삐죽이 자란 김씨는 매일 고시원 근처 난지도 관리소에서 고물을 수집하는 공공근로를 한다. 봄이 되면 건설현장에서 막노동도 한다.

“저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었는데 은행에서 보니까 적십자사가 여러 가지 일을 해요. 북한도 도와주고. 제가 낸 돈을 알아서 잘 써줄 것 같았죠.”

독신인 김씨는 1998년 지금의 고시원으로 왔다. 그 전에는 서울의 한 교회에서 일을 도우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과 경기도를 전전하며 가구, 염색, 가발공장 등에서 일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묻지 말아달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술을 많이 하셨어요. 그걸 못 견딘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이혼하셨죠. 고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학교를 그만두고 두 여동생과 살았어요.”

그러나 공장 벌이만으로는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웠다. 둘째는 고등학생 때 겪은 사건의 후유증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버티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공부를 곧잘 했던 막내는 자립해서 김씨 곁을 떠났다.

“솔직히 돈을 보내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집니다. 그동안 겪은 복잡했던 일들이 하나씩 풀리는 느낌이지요. 그렇다고 신문에까지 나올 정도는 아닌데….”

김씨는 최근 고교 중퇴 학력이 괜히 마음에 걸려 학사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구체적인 목표는 없다. 그저 공부가 하고 싶어서다.

“이번 설에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막걸리 한 잔 올려야겠어요.”

김씨는 드러난 선행이 부끄러운 듯 씩 웃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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