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電 파업비상]勞-政 "접점 없다"… 충돌 초읽기

  • 입력 2000년 11월 29일 18시 36분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첫 시험대로 떠오른 한국전력 민영화 및 분할 매각을 놓고 노정(勞政) 긴장이 극대화되고 있으나 양측의 시각차가 워낙 커 한바탕의 충돌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9일 열린 중앙노동위원회 특별조정회의가 별소득 없이 끝나면서 노조는 예고한 대로 30일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배수진을 쳤다. 반면 정부는 사상 초유의 전력 파업이 현실화되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원안(原案)대로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 협상 난항 ▼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적어도 3∼5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정부가 이를 인정한다면 한전 민영화 관련 법안 처리를 포함해 모든 것을 논의할 수 있다.” 한전 노조 오경호(吳慶鎬)위원장은 이날 중노위 조정에 앞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산업자원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를 예정대로 추진한다. 민영화 법안이 통과된 뒤 분할 매각 등 민영화 작업을 일시 연기하자는 방안은 현재로선 검토된 바 없다”고 말했다. 앞서 3차례에 걸쳐 노사정 간담회가 열렸으나 민영화 법안 처리 및 구조조정 추진 시기 등을 놓고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한전 최수병(崔洙秉)사장은 언론의 취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으며 노조 이승동 부위원장이 경찰 배치를 겨냥해 “신변 위협을 느낀다. 제3의 장소에서 하자”고 주장해 중노위 조정회의가 3시간 이상 공전되는 등 초반부터 신경전이 벌어졌다.

중노위는 이에 따라 노사 양측의 합의로 노조원들이 중노위 건물 현관 로비까지 진출해도 괜찮다는 협조 공문을 경찰에 보냈고 경찰이 이를 받아들여 노조원 30여명이 로비를 점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 노조의 전략 ▼

오위원장은 회의가 공전되자 “정부의 태도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전력은 대체재가 없으므로 파급 효과가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전향적 자세를 기대한다”며 정부를 외곽에서 압박했다. 노조에 따르면 파업 돌입 시각은 발전소 변전소 급배전 사령실 등 전력운용 핵심인력의 교대시간인 30일 오전 8시.

노조는 이미 2만4000여명의 조합원을 5∼15명씩 1개조로 편성한 뒤 지도부의 파업돌입 결정이 내려지면 조별로 출근을 거부하도록 지침을 내려보낸 상태.

또 5명 정도씩 2, 3일간 여행을 가는 ‘투어 투쟁’, 대국민 홍보 등 파업 기간 중 구체적인 행동 계획도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원자로 조종사 300명과 대국민 서비스 고장수리반은 48시간 파업을 유보토록 했다.

회사측은 파업에 대비해 대체인력을 준비해 놓은 상태. 노조는 퇴직자들이 대체인력 투입에 미온적이고 한전기공이 연대파업 의지를 밝히고 있어 여의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파업 가능성 ▼

관건은 파업에 돌입할 경우 얼마나 많은 조합원이 동참할 것이냐, 또 얼마나 오랫동안 파업이 진행될 것이냐 하는 점이다. 노조는 발전소 인력을 중심으로 파업 열기가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업 시기에 대해 오위원장은 “여러 가지 작전을 짜고 있지만 하루만에 끝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한전이 파업을 한번도 벌인 적이 없어 ‘파업 노하우’가 없고 조합원 일각의 “설마 파업까지 갈까”하는 정서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불법 파업에 따른 지도부 구속 등 부담도 적지 않아 노조도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가 실제로 파업에 돌입하더라도 조합원의 참여 열기에 따라 ‘맛뵈기 파업’이냐, ‘장기 파업’이냐가 달라질 것으로 관측된다.

12월5일 두 노총의 ‘경고 파업’때 동참하는 방식으로 파업을 다시 유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전의 파업 여부는 한국통신 철도 등 다른 공공부문이 어느 정도 지원을 하느냐 하는 점도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중노위가 직권중재 결정을 내리면 정부는 노조가 파업에 돌입할 경우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법에 따라 엄정히 대처한다는 방침이다. 또 지도부에 대해 즉각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서고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도 묻는다는 계획이어서 한전 민영화를 둘러싼 공방은 계속될 전망이다.

<정용관기자>yongari@donga.com

▼ 회사측 "비상인력 확보 정전 걱정 없어" ▼

노조의 파업에 대비해 한전은 전 직원 비상 근무체제에 들어갔다. 29일 오전 9시를 기해 직원 절반 이상이 비상 근무하는 ‘청색 경보’를 발령한 데 이어 오후 4시부터는 전직원이 비상 근무하는 ‘적색 경보’를 발령했다. 산업자원부도 이날 ‘전력 수급 비상 대책 상황실’을 설치, 가동에 들어갔다.

파업에 대비한 전력 공급 대책은 이미 짜여져 있다. 한전은 “23일 파업 예고 때 세웠던 대책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면 전력 공급에는 별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전은 비상인력으로 9600명을 확보했다. 비상인력은 5000여명의 비노조원과 퇴직자 700명, 협력업체 직원 2400명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발전소와 송변전 시설, 전주관리에 비상 투입할 필수 인원으로는 8600여명이 필요하다”는 한전의 설명대로라면 전력 공급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여기에다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일부 노조원의 합류도 기대하고 있다.

한전 고인석 부사장은 “그동안 3차례 모의 훈련을 통해 파업에 대비한 준비 태세를 갖춰놓았다”면서 “가정이나 공장에서 전력이 끊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비상 근무 체제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대략 2주일 정도라는 게 한전의 설명. 문제는 파업이 그 이상으로 길어질 경우다. 장기간 비상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예상치 못한 돌발사고가 발생할 우려도 있다.

또 다행히 정전사태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정전 사고시 20∼30분 정도 걸리던 전력복구 시간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수리나 보수 작업도 이 기간에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는 등 크고 작은 불편은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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