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노인과 바다]태풍이긴 老어부

  • 입력 2000년 9월 13일 18시 53분


우리나라 기상 관측 이래 가장 강한 바람(순간 최대 풍속 58.3m)을 불러왔다는 제12호 태풍 프라피룬. 지난달 31일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이 태풍에 맞서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펼쳐졌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한 노인이 이 강풍 속에서 3t짜리 작은 목선을 오히려 바다로 몰고 나가 15m가 넘는 파도에 맞서 자신과 자신의 생명줄인 목선을 지켜냈던 것.

주인공은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의 고흥산씨(63). “굶어 죽으나 바다에 빠져 죽으나…. 내가 죽으면 배도 죽을 거고 내가 살면 배도 살 테니까.”

지난달 31일 고씨 등 섬 주민들은 태풍이 비켜갈 것이라는 예보에 따라 26척을 육지에 올리고 8척을 방파제 뒤로 피신시켰을 뿐 흑산도항 등으로 피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풍은 정면으로 다가왔고 파도는 방파제를 넘어 미친 듯 섬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배를 육지에 올려놔도 부서질 것 같더라고. 그래서 차라리 바다로 나갔지. 떠 있으면 상하지 않으니까.”

오전 8시부터 고씨의 사투는 시작됐다. 고씨는 방향타를 움직여 뱃머리를 정확히 파도 방향으로 맞췄고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려 거대한 파도를 향해 돌진했다.

“파도가 칠 때 정면으로 배를 몰고 들어가지 않으면 날아가 버려.” 뱃사람 경력 40년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파도에 부딪힐 때마다 뱃머리는 ‘우지끈’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30초 동안 하늘로 솟구치다 다시 30초 동안 수직으로 떨어지길 10시간여.

그 사이 파도는 방파제 근처의 40t급 배 두 척을 들었다 놨다 하다 마침내 육지로 내동댕이쳤고 방파제 80m를 망가뜨리며 육지에 올려진 배들까지 산산조각 냈다.

고씨의 목선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마을 청년들이 바다에 뛰어들려 했으나 주민들이 말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됐다. 마침내 오후 6시경, 태풍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며 고씨의 배는 항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촌계장 정석규씨(43)는 “태풍이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고씨의 생환’에 마을은 잔치 분위기였다”고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한편 동아닷컴(www.donga.com)에 최근 소개된 고씨의 사연은 조회수 수만건을 기록하며 추석 연휴 최대의 감동드라마로 화제를 불러왔다.

<최건일동아닷컴기자>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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