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퇴임 이수형판사 14연詩 '나의 길'

  • 입력 2000년 7월 23일 19시 26분


“장날 소 판돈 빼먹는/다방마담의 눈 흘림에 취하듯/권력과 돈에 마취되어/길거리를 방황하던 그 시절/사실은 그것이 아니라고/이것이 법이라고/법은 살아있노라고 단 한번만이라도/조그만 목소리라도/외쳐보았더라면….”

20여년간의 판사생활을 마감하고 법원을 떠나는 중견 판사가 그동안의 추억과 회한, 제대로 돌보지 못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후배 법관들에 대한 기대 등을 장편(長篇) 연작시로 남겨 화제가 되고 있다. 27일 퇴직하는 서울지법 민사42부 이수형(李秀衡·47)부장판사는 21일 14연으로 된 연작시 ‘나의 길’을 법관전용통신망에 올렸다.

‘나의 길’은 이판사가 사직서를 제출한 7월 초부터 조금씩 덧붙여 써온 것. 이판사는 시에서 “이십여년을 기다리고 지친 다음에 남은 것은 빈 마음과 흰 머리카락, 눈물 없는 눈”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아직도 ‘판결문 마지막에 박아 넣은 자신의 이름 석자’가 떨리도록 두렵다고 말한다. 젊은 나이에 얼떨결에 시작해 “교만과 허위의 옷을 입고 허겁지겁 재판하던” 시절이 부끄럽다는 자기 반성이다. 법원을 좀더 사랑하지 못한 후회와 재판을 좀더 열심히 하지 못한 아쉬움도 나타냈다.

이판사는 판결을 앞두고 누구보다도 많은 고민을 했다고 동료 법관들은 말한다. 또 그의 판결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99년 5월 여직원을 성희롱한 회사대표에게 1000만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고 올해 3월에는 집중폭우로 피해를 본 서울 강북구 미아동 주민 김모씨가 시와 구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수방대책을 게을리한 시와 구청의 책임을 인정, 1억5000만원의 배상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판사의 판사생활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99년 10월 그에게는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전화가 잇따랐고 심지어 ‘축 이수형 사망’이라고 적힌 카드가 집에 배달되기도 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던 대한불교 조계종 고산승려에 대한 직무집행 정지결정을 내린 직후의 일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뭔가 보람된 일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 퇴직을 결심했다. 그러나 10년 넘게 사용한 슬리퍼와 법복을 보자기에 싸면서 아쉬움도 많았다. 그의 시에는 지금껏 가꿔온 난초를 특별히 부탁하고 서랍 속의 재판기록을 구석구석 뒤져 정리하면서 느끼는 허전함이 짙게 배어있다.

조만간 변호사 개업을 할 그는 아쉬움과 허전함을 후배법관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달랬다.

“밤새 불 지피고/인내심과 싸우는 후배들/부디 용기와 신념과/생명에 대한 외경을/판사로서 마지막 악수….”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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