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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5월 11일 19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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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명의 동료와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던 Y씨(28)가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일인데 쉬지도 못하고….” 1년에 여름휴가 사흘을 합쳐 기껏해야 1주일의 휴가를 낼 수 있을 뿐 휴일에도 절반은 사무실에 나와야 한다는 푸념이다.
“그래도 돈을 많이 벌잖아요”라는 물음에 그는 “작년까지 월 70만원을 받다가 올들어 연봉이 1700만원으로 올랐는데 그나마 200만원은 주식이에요. 야근수당도 없고…”라고 말했다.
▼주식 미상장 현금화 어려워▼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주식보유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말. “현금화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요.” 코스닥에 상장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 상장요건을 갖춘 업체는 10∼20%에 불과하고 상장되더라도 주가가 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최근 2, 3년 사이에 말 그대로 ‘벤처 열풍’이 불었다. 의사 검사 변호사 등 ‘사’자 돌림 직업만큼이나 정보 웹 소프트웨어와 같은 말이 들어간 직종이 유망한 직업으로 떠올랐다. 실제 몇 년 전만 해도 꿈도 꿀 수 없던 거액의 연봉 및 스톡옵션을 받아 선망의 대상이 된 사례가 적지 않다. 해방 이후 최고의 ‘대박 기회’가 찾아왔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벤처업계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겉으로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고 오히려 많은 종사자들이 낮은 임금과 원치 않는 단순작업 등에 시달리고 있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직하는 사례도 심심찮다. 한 인터넷 벤처기업에 근무하다 그만둔 J씨(24·여)는 “IT기업에 입사한IT기업 여직원들이 웹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 등 거창한 직함을 갖고 있어도 실제 하는 일은 동일한 틀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등 창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일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회사를 그만두어도 퇴직금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 한 벤처기업에서 일하던 S씨(34)는 지난해 10월말 다른 회사로 옮기기 위해 퇴직했지만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그는 끈질기게 요구해 한달 후에야 당초 받아야 할 퇴직금의 4분의1인 120만원을 겨우 받았다. 현행법에 따르면 퇴직금은 퇴직 후 14일 안에 반드시 지급하게 돼 있다. S씨는 최근 퇴직금의 늦은 지불과 적은 액수에 대해 노동부에 민원을 내놓은 상태.
▼야근수당-퇴직금 못받아▼
군복무 대신 입사한 병역특례자들의 경우도 큰 문제. 민주노총에 따르면 병역특례자들은 임금차별 해고위협 이직부자유 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입사시 정해진 업무와 다른 일에 배치되는 경우도 많다. 많은 IT업체들이 직원 10명 중 3, 4명은 병역특례자를 고용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벤처업계에도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자는 움직임이 조심스레 일고 있다. 홈페이지 운영업체인 D사는 지난해 8월 직원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취업규칙을 서면으로 작성하고 퇴직금과 휴가제도도 공식화했다. 올 2월에는 인터넷 벤처기업 ㈜멀티데이터시스템에서 국내 벤처업계 최초의 노조가 결성됐고 단체협상이 결렬돼 최근 노동쟁의가 발생하기도 했다.
▼노조결성등 개선 움직임▼
‘벤처 환상’의 실상을 냉정히 짚어보려는 움직임도 생겨나고 있다. 진보네트워크는 11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한국사회의 벤처열풍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가졌으며 민주노총도 이달 안에 100여개 벤처기업에 대한 실태조사를 할 예정이다.
민주노총 박점규(朴点圭)정보통신차장은 “많은 정보통신 종사자들이 저임금과 과로, 원치 않는 업무로 내몰리고 있지만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독하는 시스템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 벤처업계 대표는 “벤처업계에 몰린 젊은이들이 힘들이지 않고 쉽게 돈만 벌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도 고민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스톡옵션 등 현물 급여를 받고 일하며 아이디어 싸움을 하는 벤처업계 종사자를 ‘아날로그 시대의’ 근로기준법으로 감독할 수 있을지, 또 감독하는 게 실효성이 있을지 논란이 많다”며 “그러나 디지털 경제에 걸맞게 근로기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한다”고 말했다.
<김승진기자>saraf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