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귀국동포들 씁쓸한 '고향의 봄'…외로움-병마 시달려

  • 입력 2000년 3월 23일 19시 37분


22일 오전 경기 안산시 사동의 사할린 한인아파트. 지난달 이곳에 입주한 박연도씨(75) 내외는 요즘 사할린에 남겨둔 자식과 손자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꺼내 보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살아서 밟게 돼 마냥 좋아했는데…. 하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니 어쩔 수 없잖아.”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됐다 광복 이후 일본측이 송환을 거부, 이역만리 낯선 땅에 버려진 뒤 반세기가 지나서야 귀환의 꿈을 이룬 박씨를 비롯한 ‘사할린 한인 1세대’ 900여명.

주위의 환영을 받으며 고국을 찾은 기쁨도 잠시. 대부분 70, 80대의 고령인 이들은 귀향의 ‘대가’로 치른 가족과의 생이별, 오랜 타향살이로 얻은 지병, 빠듯한 생계와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 등 3중, 4중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귀국의 감격도 잠깐◇

▼또다른 이산가족▼

23일 오전 아파트 복지관 앞 공터에 모인 30여명의 노인들 대화 속에는 사할린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간밤에 손녀딸이 꿈에 보였어. 녀석 재롱 한번 봤으면 원이 없겠는데….” “아들 내외가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았다는데 잘 지내는지….”

죽어서나마 고국 땅에 묻히겠다는 일념으로 ‘영구 귀국’을 결정한 이들은 그 대가로 현지의 가족들과 헤어지는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귀국 요건이 65세 이상인데다 1명의 가족만 동반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자식들과 헤어져 노부부만 귀국길에 오른 것.

한달 전 이곳에 입주한 김모씨(78)는 “함께 왔다가 현지로 돌아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며 “늙고 병든 내외가 쓸쓸히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한숨지었다.

지난달 이곳에 입주한 장세종씨(78)는 최근 대한적십자사에 사할린의 셋째딸을 초청해 함께 살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지병인 폐암이 악화돼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씨는 남은 여생이나마 가족의 간병을 받고 싶었던 것. 그러나 재원 문제와 형평성을 감안해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에 장씨는 고개를 떨궈야 했다.

◇일부 중증질환 醫保 안돼◇

▼투병생활▼

이곳에 입주한 한인동포 상당수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인데다 고혈압 당뇨 백내장 등 현지에서 얻은 각종 지병을 앓고 있다.

일부는 암 등 각종 난치병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돌봐줄 간병인조차 없이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는 실정. 시청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매일 대형승합차로 100여명의 노인들을 인근 병원으로 후송해 진료를 받도록 하고 있지만 감기 몸살 등의 진료에 그칠 뿐 중증 질환자에 대한 체계적인 검진과 치료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모씨(78)는 “장시간의 비행과 낯선 환경으로 귀국하자마자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일부 중증 질환의 경우 진료비 때문에 정밀검사를 꺼리는 경우도 많다”고 귀띔했다.

▼생계와 취업문제▼

1종 생활보호대상자인 이곳의 한인동포들에게 매달 지급되는 연금은 생계비 경로연금 교통수당 등을 합쳐 30만원 안팎. 별다른 수입원이 없는 이들은 “한달을 나기에 빠듯한 액수”라고 입을 모은다.

이 때문에 쌀과 부식 구입 등 기본적인 생계비 외에 옷가지나 생활용품의 구입 또는 의료비 지출은 엄두도 못 내는 형편.

조모씨(72)는 “귀국 때 갖고 온 얼마의 정착금도 거의 바닥나 앞으로 최대한 아껴 쓸 생각이지만 비싼 물가가 걱정된다”며 “최근에는 사할린 가족들에게 국제전화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대부분의 한인들은 공공근로사업이나 경비직 등 생계에 도움이 될 만한 일거리를 원하지만 고령인 탓에 여간해선 자리가 나지 않는다.

2년 전 귀국해 서울에서 살다 입주한 이모씨(71)는 “그동안은 일당 1만원짜리 소일거리라도 있었는데 이곳에 온 뒤부터는 하루 종일 아파트 단지만 맴돌고 있다”고 말했다.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

22일 오후 아파트 단지 내 복지관 앞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난생 처음 전화요금 통지서를 받아든 한인들이 납부방법을 몰라 직원들에게 ‘질문공세’를 벌였던 것. 한 직원이 진땀을 흘리며 설명에 나섰지만 대부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수십년간 체제와 관습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기만 하다. 한 자원봉사자는 “공공기관 이용법이나 교통편 등 기초적인 생활정보 제공을 위한 적응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2주 전 입주한 박모씨(76)는 “귀국 때 가져온 예전의 땅문서로 선친의 땅을 찾으려다 한국의 친인척들과 재산권 분쟁을 일으켜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소개했다.

◇정부 제도적 지원 절실◇

▼대책▼

이들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도 사할린 현지의 가족들에 대한 절박한 그리움.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가족 상봉을 돕기 위한 정부차원의 제도적인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민간기관의 보다 폭넓은 의료지원과 함께 중증 질환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기검진 등 의료대책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 또 필요시 언제든 찾아가 고국생활의 불편을 상담할 수 있는 전문상담센터를 운영하는 것도 이들의 고민을 덜 수 있는 한 방편이다.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새사랑교회 임동선목사는 “고국 실정을 거의 모른 채 귀국한 동포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선 사회의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윤상호·최호원기자> ysh100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