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앞 아이스크림 약속…23년만에 사제간 '부라보'

  • 입력 2000년 2월 22일 19시 43분


“선생님, 오늘은 진짜로 부라보콘 사주실거죠?”

‘2000년 2월22일 오후 2시 덕수궁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로 했던 고등학교 사제간의 23년전 약속이 지켜졌다. 1977년 서울 성신여대 부속여고(현 건대부고) ‘영(英)’반 담임선생님과 이제는 초중고생 자녀의 엄마가 된 제자들이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난 것.

약속시간 30분전인 오후 1시반. 김학민(金學敏·59)서울 건대부고 수학교사와 체육대회 때 반의 자리배치를 두고 부라보콘 내기를 했던 제자들이 속속 도착했다. 40명으로 불어난 제자들은 23년만의 만남에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며 반가워했다. 오랜 시간의 흐름에 약속을 자칫 ‘깜빡’할 뻔하다 본보기사(2월10일자 A30면)를 보고 기억을 되살려낸 김교사. 25분이나 지각했지만 도착한 순간 제자들은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의 목소리로 “선생님”을 외치며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쩜 그대로세요” “우리만 늙었나봐요”하는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태제과에 사연을 보내 이날 약속을 성사시키는데 ‘일등 공신’역할을 한 주부 박충희(朴忠姬·41·경기 고양시 일산구 주엽동)씨가 “선생님 여전히 멋쟁이세요”라며 카네이션 꽃다발을 안겼다. 김교사가 “아이스크림 떼어먹을까봐 그리 소문을 냈느냐”며 눈을 흘겨보지만 입가에는 한껏 반가움이 묻어났다. 인사와 악수가 이어진 뒤 김교사는 해태제과측이 박스째 들고나온 딸기맛과 바닐라맛 부라보콘을 제자들의 손에 쥐어줬다. 당시 100원이었던 부라보콘이 지금은 700원이지만 해태제과측은 특별히 23년 전 가격으로 판매했다.

만남을 지켜보던 해태제과의 김호식(金浩植)이사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 회사가 위기를 겪으며 자칫 사라질 뻔했던 부라보콘이 시간의 벽을 넘어 선생님과 제자를 재회시키는 고리가 됐다니 감개무량하다”며 자랑스러운 표정.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끈끈한 사제간의 정에는 ‘천년’의 세월도 벽이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김교사와 제자들은 못나눈 이야기를 한껏 풀어내려는 듯 가까운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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