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서거 50돌]「민족 큰스승」기릴 기념시설 없어

  • 입력 1999년 6월 25일 19시 14분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 살해범인 안두희(安斗熙)씨는 96년 10월23일 버스운전기사 박기서(朴琦緖)씨의 ‘정의봉’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65년에는 20대 청년 곽태영(郭泰榮)씨가, 80년대에는 권중희(權重熙)씨가 각각 안씨에 대한 ‘응징’을 시도했다.

백범 관련 서적을 읽고 ‘역사의 정의’를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게 이들 ‘필부(匹夫)’들의 한결같은 술회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는 백범은 영원한 ‘마이너리티(소수파)’였다. 이수성(李壽成)백범기념사업협회장이 “95년 국무총리 취임 직후 ‘전례가 없다’고 만류하는 보좌관들을 뿌리치고 효창원을 찾은 것이 대한민국 국무총리로선 최초의 백범묘소 참배였다”고 말할 정도로 백범은 정부 차원에서 무시당했다.

이에 따라 기념사업도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안중근(安重根)의사,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선생, 윤봉길(尹奉吉)의사, 유관순(柳寬順)열사 등의 애국지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꽤 있지만 백범 기념시설은 없다. 49년 백범 서거 직후 당시 한독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백범기념사업협회(초대회장 조완구·趙琬九)가 결성됐지만 이렇다할 활동도 못하고 지금껏 가정집 셋방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형편이다.

또 효창원이 있지만 이는 백범이 직접 당시 돈 8만원을 주고 사용권을 얻은 땅이다. 백범은 환국할 때 운구해온 항일 열사들의 유해를 효창원에 안치하면서 자신도 나중에 그 곳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 그러나 정부는 그마저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효창원 일대의 아름드리 노송 15만그루를 베어내고 그 곳에 축구장을 세운 것.

이대통령 이후 대통령선거 때마다 ‘백범기념관’ 건립이 공약으로 제시됐지만 말로만 끝났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절 남산에 백범 동상이 세워졌고 전두환(全斗煥)대통령 시절 효창원에 ‘7열사 사당’이 건립된 게 정부가 백범을 기리기 위해 한 일의 전부다.

백범기념사업협회의 한 관계자는 “소수파인 김대중(金大中)정부가 들어서면 백범의 위상도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으나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300억원을 지원한다는 정부가 백범기념관은 외면하고 있다고 항변했다.정부가 소극적이다보니 민간 차원의 기념사업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백범 서거 50주기를 맞아 전직대통령과 여야중진의원 등 각계 인사들을 망라, 4월 결성된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가 이 벽을 넘을지 주목된다.

〈윤승모기자〉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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