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정치권司正 입장선회 배경]『개혁불만 위험수위』판단

  • 입력 1998년 7월 28일 19시 27분


여권 고위관계자들의 입에서는 자주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 야당 중진들의 실명이 줄줄이 열거된다. 물론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석에서다. “모의원은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비리혐의가) 걸렸다더라” “고구마 줄기 하나만 캐도 줄줄이 달려 나온다더라” “모의원은 60억원, 모의원은 20억원, 모의원은 10억원을 정치자금으로 받았다더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같은 발언은 대개 “수사를 하면 정치보복이라고 할텐데…”라며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였다.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야당 중진들의 혐의에 대해 “수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여권의 이같은 기류가 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7·21’재보궐선거의 패인 분석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당 정세분석위원회(위원장 김영환·金榮煥)가 28일 간부회의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국민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불평등’이 패인의 주요인으로 지적됐다. 일반 국민은 실업과 생활고에 고통받고 있는데도 정치권과 재벌기업 등 ‘가진 자’들은 죄가 있어도 처벌되지 않는 ‘유권무죄(有權無罪)’분위기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에 대한 성역없는 사정과 재벌그룹의 과감한 구조조정만이 폭발 일보직전의 민심을 추스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당 정세분석위의 시각이다. 국민회의측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여름휴가중에 뭔가 구상을 가다듬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표적사정은 절대 있을 수 없다”면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비리가 드러나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최근의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로 검찰은 정권출범 직후부터 개인휴대통신(PCS) 종금사 부동산신탁 청구 기아 등과 관련해 수사를 계속해왔고 비리관련기업인과 공직자들을 사법처리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검찰의 수사권에 든 정치인은 한나라당 이신행(李信行)의원 정도다. 부동산신탁사에 대한 수사과정에서는 대출압력을 행사한 정치인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검찰은 부동산신탁사 간부들을 사법처리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청구수사의 경우에도 숱한 정치인의 명단이 정치권에서는 회자되고 있는데도 정작 검찰의 수사결과는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은 개혁의 무풍지대’라는 냉소와 비아냥이 정치권과 정부를 향해 쏟아지고 있다.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 앞에서 실업대책마련을 촉구하며 집회를 벌였던 민주노총 이성도(李成道)조직강화특위위원장은 “있는 그대로 수사를 하는 것이 무슨 정치보복이냐”며 “노동계에서는 검찰이나 정치권을 믿지 못해 특별검사제 도입 요구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 영신택시의 송승준(宋昇峻)씨는 “정치인 사정은 말만 무성했지 아무것도 이뤄진게 없다”며 “정치인이 개혁의 예외가 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여권의 정략적 판단에 따라 정치인사정이 이뤄져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높다. 여권이 만일 정계개편 등 정치적 고려에 따라 편의적으로 정치권사정을 진행시킬 경우 ‘정치 개혁’이라는 당위성과 명분마저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정치적 부담을 우려, 명백한 범법사실마저 처벌하지 않는다면 결국 여권의 부담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여권인사라는 이유만으로 어떤식으로든 배려를 해주는 식의 사정이 돼서도 안된다는 지적도 많다.

경실련 고계현(高桂鉉)시민입법국장은 “사정의 칼날을 여권에 유리하게 운용하는 것도,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범법사실을 눈감아 주는 것도 모두가 당리당략”이라며 “정치권과 검찰이 있는 그대로 과감하게 비리혐의를 수사하는 정도를 걷는 자세가 절실하다”고 충고했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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