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얼굴없는 천사」,자선냄비에 12년째 1백만원기부

  • 입력 1997년 12월 8일 20시 05분


「얼굴없는 산타클로스」가 올해에도 찾아올까.

대기업 연쇄부도 사태의 충격과 국제통화기금(IMF)시대의 찬바람만 윙윙거리는 세밑의 거리에 이번에도 「하얀 봉투의 천사」가 소리없이 찾아와 푸근한 사랑을 전하고 갈 것인가.

8일 오후 1시경. 이날 오전부터 내리던 스산한 겨울비와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바뀐 서울 중구 명동 거리에서 자선냄비를 지키던 구세군 대원의 얼굴에는 그를 기다리는 희망의 빛이 넘쳐나고 있었다.

구세군 대원이 기다리는 익명의 산타클로스가 이 곳 명동의 자선냄비를 처음 방문한 것은 지난 85년. 자선냄비 한 개당 하루 모금액이 10만원을 채 넘지 못하던 어느날 명동 롯데백화점앞 자선냄비안에 하얀 봉투에 담긴 1백만원권 수표가 넣어져 있었다.

이듬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명동의 자선냄비안에는 어김없이 똑같은 1백만원권 수표가 하얀 봉투에 담겨져 온 세상에 따듯한 온정을 소리없이 뿌리고 갔다.

구세군 대원의 호기심은 점점 커졌다. 대원들은 이 하얀 봉투의 주인이 동일인임을 확신하고 89년부터 얼굴없는 그를 찾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롯데백화점 앞을 비롯해 명동 일대에 마련된 5군데 자선냄비를 지키는 대원들은 표정을 감춘 채 하얀 봉투를 넣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 보았고 1백만원권 수표의 발행인을 추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헛수고였다. 대원들의 「감시망」을 뚫고 하얀 봉투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얼굴없는 산타클로스를 찾으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 구세군 대원들은 더 이상 그를 확인해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난해까지 12년간 명동의 자선냄비에는 1백만원권이 담긴 하얀 봉투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담겨졌다.

이 산타클로스를 본 구세군 대원은 아무도 없다. 다만 하루 모금을 마치고 구세군 건물로 돌아와 자선냄비에 담겨 있는 1백만원권 수표가 든 하얀 봉투를 발견하고 나서야 올해에도 산타클로스가 다녀 갔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다.

구세군 섭외부의 이재성(李在星·38)사관은 『산타클로스가 자신의 선행을 알리려 하지 않으려는 것인 만큼 그 뜻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그의 봉투는 잔뜩 움츠러든 세밑의 거리를 녹이는 한줄기 햇살』이라고 말했다.

〈이현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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