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 입력 1997년 6월 9일 20시 47분


지난 4일 李石(이석)씨 사건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으면서도 당당히 고개를 들고 담배를 피우던 吉素延(길소연·여·24)씨. 바로 다음날 사건현장을 목격한 이모씨(40·구두수선공)가 등장하면서 고개를 떨구기 시작한 그는 6일 오후 이씨를 감금폭행한 혐의로 마침내 구속되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너희들이 바랐던 것이 고작 죄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었니?』 조사를 맡은 형사가 탄식하며 툭 던진 한마디에 길씨를 얽매던 「책임」과 「의리」를 헤치고 「양심」이 고개를 들었다. 『서총련투쟁국장이 직접 폭행에 가담했다. 조국통일위원장도 직접 이씨의 조사를 지휘했다…』 한총련의 조직에는 느닷없는 폭풍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길씨로서는 양심과 참회의 증언이었다. 길씨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지난 92년 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배의 손에 이끌려 동아리방을 찾으면서부터다. 조국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양심….풋풋한 인간미를 가진 선배들의 열변이 그의 가슴을 열었다. 한낱 구경꾼이었던 그가 시위에 참여하고 어느덧 시위를 주도하면서부터는 이미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다. 착하고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던 길씨는 선머슴처럼 변했고 「효성스런 둘째 딸」 「공부 잘하는 학생」의 꿈은 「조직에 없어서는 안될 일꾼」이라는 꿈에 자리를 내줬다. 그러나 떳떳했다. 또 모두가 그녀를 원했다. 길씨는 학교는 졸업했지만학생운동은차마졸업할수없었다. 지금 길씨에게는 갑자기 한양대 학생회관에 나타난 이석씨보다 훨씬 더 낯선 번민과 고통이 찾아들었다. 서울 성동경찰서 유치장 한쪽에서 한숨과 눈물로 뒤범벅된 채 웅크려 있는 길씨는 학생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의 양심과 학생운동을 고발한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박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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