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3대 세습 지도자 김정은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7형’ 발사장에 열 살 짜리 둘째로 알려진 딸 김주애를 데리고 나와 공개하자 한국과 국제사회에 또 ‘북한 세습 지도자 알아맞히기’ 게임이 시작된 형국입니다. 김주애가 김정은의 뒤를 이을 ‘4대 세습 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두고 전문가들의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노무현 정부)은 11월 30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이미 김주애로 후계자가 결정이 됐고 앞으로 아마 웬만한 데는 다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을 시킬 것 같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는 2일자 한 신문 칼럼에서 김주애가 후계자로 등장한 것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두 가지 가설을 제기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1월 18일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참여했던 공로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 둘째 딸 김주애를 동행했다. 노동신문 뉴스1
“2010년 얻은 아들(정보가 맞는다면)이 지도자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김정은의 아들을 얻은) 현송월과의 권력다툼 속, 이설주가 김위원장에게 김주애를 일찍 후계자로 공개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은 아닐까.”
일단 김주애에 대한 김정은의 ‘의전’은 파격적입니다. 11월 18일 미사일 발사장에서 앳띤 모습의 김주애와 동행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했습니다. 27일 미사일 발사 공로자들을 치하하는 행사에 또다시 김주애를 등장시켰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이설주를 꼭 닮은 모습으로 연출된 채였습니다. 인민군 장성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매체들은 “존귀한 분” “제일 사랑하는 자녀” 등 우상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사례를 돌아볼 때, 열 살 난, 그리고 여성인 김주애를 후계자로 단정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김주애가 아들이 아닌 딸이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성년인 자녀를 후계자로 등장시킨 적이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김주애의 오빠와 동생으로 알려진 두 아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는 것은 큰 변수입니다. 애버라드 대사는 이 아들들이 ‘지도자감은 아닐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김정은의 등장 과정을 보면 최후의 순간까지 후계자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북한스럽습니다. 김주애의 등장은 오히려 그녀가 후계자가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고도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세 아들 중 누가 3대 세습 후계자가 되는지를 놓고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 점치기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장남인 김정남이 가장 많이 등장했고, 그가 아버지의 눈에 나자 차남 김정철이 그 다음을 이었습니다. 3남 김정운(개명 하기 전의 이름)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 아버지 김정일이 정철과 정운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은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려졌다가 일어난 뒤인 2008년 겨울에야 후계자 지명 작업에 나섰습니다. 몇 달 전인 그해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국방연구원 박사 22명이 집단 설문조사를 통해 후계구도를 점친 보고서가 1면과 3면에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방부 차관을 지난 백승주 전 국회의원이 미국 정부의 용역을 받아 비밀리에 작성한 것입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박사 22명의 집단 예측은 한마디로 거의 빚나갔습니다.
박사 22명 중 45.5%인 10명은 ‘김정일이 자연사한 뒤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지금 그런가요? 아닙니다. 후계자가 누가 될지에 대해 36.4%(8명)가 김정철을 꼽았고 31.8%(7명)는 김정남, 22.7%(5명)는 장성택을 점쳤습니다. 그런가요? 김정철은 동생의 그늘에 가려 두문불출 살고 있고 김정남 장성택은 저세상에 가고 없습니다. 심지어 보고서는 당시 기준으로 5년 내에 승계가 이뤄지면 ‘장성택-김정남’ 조합이, 5년이 지나면 ‘김정철-정운’이 유리하다고까지 내다봤습니다. 김정일은 3년만에 죽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우선 김정일 사후에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은 사실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가깝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그러기를 바랐으니까요. 김정운의 낙점을 예상하지 못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북한이 정보를 철저히 숨긴 상황에서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의 후계자 지명 이론을 적용해 ‘학문적인 추측(academic guessing)’ 한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백 박사는 논문을 작성하면서 비교사회주의 정치학자 레슬리 홈스 박사의 ‘3Ps+X’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독재국가에서 최고지도자가 권력을 잃을 경우(X), 권력기반(Power base)과 인격적 자질(Personal qualification), 정책능력(Policy making ability)을 가진 인물이 후계자로서 권력을 차지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렇게 흐루시쵸프는 스탈린의 후계자가 되었고 덩샤오핑도 마오저뚱 사후 혼란한 정국 속에 등장했다는 거죠.
이 이론을 적용하고 보면, 장성택이라는 든든한 후원 세력이 있고(권력기반) 김일성 주석의 장손, 김정일 위원장의 장자(인격적 자질)인 김정남이 김정철이나 김정은보다는 나아 보였던 것입니다. 정책 수행 능력이 불투명하기는 셋 다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만일 김정남이 아니라면 둘째 김정철이었던 것이구요. 하지만 정철과 정운 두 아들을 숨겨놓은 채 관찰했던 김정일은 모든 면에서 김일성과 자신을 닮은 정운을 마음속에 낙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기류를 눈치 챈 외부인은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정도였음이 훗날 드러났습니다.
소련이나 중국과 달리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 중 유일하게 세습독재를 하고 있다는 점도 결정적인 차이인 것 같습니다. 독재자 사후 성이 다른 어떤 엘리트라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소련과 중국에서는 ‘3Ps+X’라는 복잡한 고려사항이 필요했겠지만 세습독재 국가인 북한에서는 오로지 아버지의 마음에 든 아들만이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북한 김씨 독재의 미래를 전망하느니 ‘차라리 동전을 던지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구나 21세기에 세습 독재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국민들의 궁핍과 인권의 유린을 전제로 한 세습은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최근 시진핑 주석의 3연임 이후 중국 국민들의 불만들이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북한 내에서 들려오는 불만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 가운데 숨겨진 두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정보력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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