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왜 김여정이 아니라 어린 딸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한반도 가라사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0일 14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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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공개된 노동신문의 화성-17형 미사일 발사 관련 ‘정론’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습니다. A4용지로 7장이나 되는 긴 글은 “핵에는 핵으로, 정면대결에는 정면대결로!”라는 구호로 시작해 같은 구호로 끝을 맺습니다.

자신들이 18일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 1만5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고 자축하면서 “그것은 핵선제타격권이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국가가 미국의 핵패권에 맞설 수 있는 실질적힘을 만장약한 명실상부한 핵강국임을 세계 앞에서 뚜렷이 실증하는 가슴벅찬 호칭인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한마디로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핵으로 맞장을 뜨겠다는 말입니다. 핵 미사일 개발이 미국의 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방어용이라는 그동안의 레토릭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 자신들도 미국을 선제타격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다지 새로워보이지 않는 이같은 주장은 ‘대내 선전용’으로 보입니다. 정론의 대부분은 ‘위대한 수령 동지’의 쾌거를 자랑하는데 할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정론’을 통해서 우리는 북한의 오랜 습성, 중국에 빌붙어 생존을 연명하고 있는 가난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을 직접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척 하는 ‘강대국 코스프레’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서 위협을 당한 국가가 자신의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해 상대방에 대처하는 전략을 ‘내적 균형(internal balancing)’이라고 합니다. 공격적 현실주의자로 불리는 시카고대 미어샤이머 교수는 “국방비를 늘리거나 병력의 숫자를 증강시키는 징집제도” 등을 내적 균형 유지 노력의 사례로 설명하면서 말 그대로 “자조(self help)”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적어도 미국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옛 소련이나 지금의 중국 등 강대국에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총체적인 국력 면에서 미국에 상대도 되지 않는 약소국 북한이, 그것도 겹겹이 경제 봉쇄와 코로나19 경제난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정책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은 ‘강대국인 척’ 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북한은 핵개발에 집착하며 강대국 코스프레를 계속하는 걸까요. 김정은이 18일 화성-17형 ICBM 발사장에 10대 딸을 데리고 나와 대내외에 공개한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벌써 3대째 이어온 수령 절대주의 세습 독재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최강대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홍보하면서 김 씨 독재체제 유지의 정당성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말입니다.


특히 그동안 ‘백두혈통’이라며 후계자로도 거론되던 여동생 김여정 대신 성인도 아닌 어린 딸을 위험한 ‘괴물 미사일’ 앞까지 데리고 나와 홍보사진의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김정은이 세습독재 체제의 유지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동안 오빠를 지분거리에서 보좌하던 김여정은 과거 김정일의 김경희가 그랬던 것처럼 ‘곁가지’로 분류되어 김씨 4대 세습의 뒷막으로 사라지는 운명의 첫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김정은은 이를 통해 ‘핵과 미사일로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내 아이들도 이렇게 잘 크고 있으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래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니 다른 생각들 말고 나에게 충성하라’ 는 메시지를 ‘인민들‘에게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분석은 향후 북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듭니다. 김정은 세습 독재 체제의 균열이 없이는 공격적인 대외 핵정책을 포기하기 어렵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북한이라는 국가의 내부 정치와 권력의 문제에 대해 후원국인 중국도, 같은 민족인 한국도 바람직한 변화를 추구할 효과적인 수단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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