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설득해 버스 확보, 탈레반 검문소 실랑이끝 통과… “천운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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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작전’ 긴박했던 순간들

태극기 들고 “한국 가요” 한국으로 이송될 아프가니스탄 현지 조력자 가족이 25일(현지 시간) 아프간 카불 공항에서 공군 수송기(C-130J)에 탑승해 태극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공군 제공
태극기 들고 “한국 가요” 한국으로 이송될 아프가니스탄 현지 조력자 가족이 25일(현지 시간) 아프간 카불 공항에서 공군 수송기(C-130J)에 탑승해 태극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공군 제공
“정해진 시간에 맞춰 ○○로 오라.”

디데이(D-Day)는 24일. 비상연락망으로 급박하게 버스 집결 시간과 장소가 통보됐다. 작전 대상자는 모두 365명. 앞서 자력으로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 진입에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리 정부의 현지 재건 활동에 협력했던 아프간 현지인과 그 가족들. 절반가량은 10세 이하 어린아이들로 이달 태어난 갓난아기도 있었다.

우리 정부 입장에선 ‘조력자’지만 탈레반은 이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주요 거리마다 촘촘하게 세워진 ‘탈레반 검문소’를 통과하는 건 이들에게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정부 당국자는 “검문소가 그들에겐 ‘지옥문’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주아프간 한국대사관에서 일했던 한 아프간 남성은 “탈레반은 누가 한국 정부와 일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 “탈레반 검문소는 지옥문”


작전을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현지에 있는 미군이 이달 말 철군하기로 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것. 정부 관계자는 “현지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27일을 사실상 (구출) 마지노선으로 봤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이달 초 아프간 조력자 구출 계획을 세운 뒤 외교부를 중심으로 국방부, 법무부 등이 공조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66명의 특수임무단을 태운 우리 군 수송기 3대가 투입된 건 23일 새벽. 한국행을 희망한 391명에겐 20일 공항 집결 디데이(24일)를 알리고 공항 게이트 안까지 오라고 통보했다.

관건은 탈레반의 위협을 뚫고 이들이 무사히 공항에 올 수 있을지였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틀이 지나도 공항에 도착한 사람은 26명에 불과했다. 자력으로 공항 주변에 밀집한 탈레반 검문소를 뚫고, 수천 명의 인파가 운집한 공항 안까지 진입하는 게 그만큼 힘들었다.

고민하던 우리 정부의 시야에 ‘버스’가 포착됐다. 미국이 22일 탈레반과 협의해 버스로는 외국 정부 조력자를 카불 공항까지 이송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 바로 여러 채널로 미국을 설득해 운용 가능한 버스 6대를 확보했다. 버스 확보 즉시 아직 공항에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시 버스 집결지와 시간을 통보했다.

그렇게 한국행 희망자 전원이 시간에 맞춰 버스 6대에 나눠 탑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공항 도착 직전 몇몇 탈레반 검문소에서 “통과 못 한다”고 위협한 것. 우리 공관원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여행증명서를 보여주자 “원본이 아니다”라며 우기는 탈레반도 있었다. 정부 관계자는 “한국에선 다 이렇게 한다면서 실랑이한 끝에 겨우 다시 이동할 수 있었다”고 했다.

○ 작전명 미라클… 378명 한국 땅 밟아


신생아들, 버스 탑승 공군 공중급유수송기(KC-330)를 타고 26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아프가니스탄 현지 조력자와 신생아 2명 등 일가족이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인천=사진공동취재단
신생아들, 버스 탑승 공군 공중급유수송기(KC-330)를 타고 26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아프가니스탄 현지 조력자와 신생아 2명 등 일가족이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인천=사진공동취재단
26일 마침내 아프간 조력자와 그 가족 378명이 한국 땅을 밟았다. 정부가 아프간에서 이들의 탈출 계획을 세운 지 한 달여 만이다. 기착지인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탑승 공간 부족 등을 이유로 오지 못한 나머지 13명(3가구)은 27일 오후 한국에 온다.

2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수속을 마친 아프간인들은 오후 6시 6분경 입국장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지친 기색이 보였고 히잡과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눈빛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에 당황해하는 사람도 보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내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한 젊은 형제도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이들은 버스 15대에 나눠 타고 공항 내 별도 공간으로 이동한 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검사 등 방역 절차를 거쳤다. 음성 판정을 받은 이들은 27일 오전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이동해 자가 격리 기간(14일)을 포함해 6∼8주가량 지내며 한국 사회 정착을 위한 교육을 받는다. 이후 정부가 마련한 다른 시설로 옮겨진다.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26일 TBS 라디오에서 “(이번 작전은) 아주 위험했지만 천운이 따랐다”고 했다. 이번 현지인 수송 작전명을 ‘미라클’(기적)로 정한 이유에 대해선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 처해 있던 아프간 현지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8월 초부터 보안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문재인 대통령도 아프간인 안전이 확보됐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안도했다”고 전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인천=공승배 기자 ksb@donga.com
#탈레반 검문소#천운#미라클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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