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죽었다는데…” 그때 운명이 바뀌었다[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8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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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의 김권능 씨. 길고 어두운 미로를 벗어나 행복한 듯한 표정이다. 김권능 씨 제공.
2018년 10월의 김권능 씨. 길고 어두운 미로를 벗어나 행복한 듯한 표정이다. 김권능 씨 제공.
그날따라 추위는 매서웠다. 새벽 4시 중국 지린(吉林)성 장춘(長春)을 떠난 호송차는 도로가 얼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오전 11시 반이 넘어서야 목적지인 투먼(圖們)의 북중 국경다리에 도착했다. 오전 9시~10시 경 북한 세관에 나가 보위부에 죄수를 넘겨주려던 당초 계획이 틀어졌다.

다리를 지키는 변방대 장교가 말했다.

“지금 조선쪽 세관에 사람이 보이지도 안고 전화를 해도 받는 사람도 없으니 점심 먹고 다시 오시오.”

손발에 족쇄를 찬 죄수 한 명과 다섯 명의 호송원을 태운 차량은 식당을 찾아 투먼 시내로 움직였다. 식당을 찾아 헤매는데 갑자기 변방대에서 전화가 왔다.

“당장 차를 돌려 오시오.”

“아, 조선쪽에 사람이 나왔나 보군. 죄수를 넘겨주고 우리끼리 편하게 점심 먹으면 되겠다.”

호송원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며 북중 국경 다리 옆으로 다시 왔다.

변방대 막사에 도착하니 비상이 걸려 있었다. 군인들이 총과 쌍안경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뭔 일이래?”

호송원 한 명이 휴대전화로 검색하더니 깜짝 놀랐다. 그리곤 죄수에게 이를 보여줬다.

“김정일이 죽었다는데….”

2011년 12월 19일 12시. 북한에서 김정일 사망을 공식발표한 순간이었다.

중국 감옥에서 10년을 복역하고, 이날 형기가 만료돼 고문과 처형이 기다리는 북송길에 올랐던 김권능(본명 김경일) 씨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었다.

김 씨는 오후 내내 변방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김정일 사망이라는 변고를 맞은 북한 쪽에선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 씨는 삭막한 풍경이 펼쳐진 두만강 건너편 북한을 건너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당신(김정일)이 죽는 것을 보고 가는구나. 나보다 앞세웠으니 이제 북한에 끌려가 죽더라도 원이 없다.’

저녁까지 북에서 전화를 받지 않자 호송원들은 옌지(延吉)로 돌아와 하루 밤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날도 북한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20일 저녁이 다가오자 호송원들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김 씨가 10년 전 중국 재판소에서 받은 형기는 이날 저녁 9시면 만료된다. 그 이후엔 더이상 김 씨를 잡아둘 명분이 없다. 호송원들은 그를 옌볜(延邊) 출입국관리소로 데려가 넘겼다.

“탈북자인데, 이제부터 여기서 알아서 하시오.”

호송원들은 이 말을 남긴 채 장춘으로 돌아갔다. 김 씨는 8년 전까지 이곳 감옥에서 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8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3개월의 수감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 영화 ‘크로싱’이 나오기까지
김 씨는 1976년 황해남도 신원 군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광물 탐사대원인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검덕으로 이주했다. 검덕은 연, 아연, 마그네사이트 등이 풍부한 북한의 대표적인 광업도시다. 여기서 중학교와 3년제 검덕광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검덕에 처음 갔던 1980년대 중반만 해도 검덕의 산은 푸르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광산 마을인 검덕은 사람이 가장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 바뀌었다. 산도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2020년 9월 7일 검덕을 통과한 태풍 ‘마이삭’은 수천 세대의 집을 파괴했다. 검덕에서 살던 김 씨는 “어떻게 재난이 발생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검덕은 골짜기가 깊지 않고 강 옆에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나무 없는 산에서 산사태가 나면 강이 막히고 순식간에 마을이 잠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사태로 막혔던 곳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다시 터지면 아래 마을까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다. 검덕은 강 옆에 분광 시설들이 있다. 사품 치는 강물은 분광된 돌가루를 잔뜩 머금은 ‘묵직한’ 물이라 아무리 든든한 제방도, 건물도 견디기 어렵다.

김 씨는 사람들이 굶주려 쓰러지는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7년, 살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21세 때였다. 1년 동안 중국의 농촌에 숨어살며 농사를 짓고, 벌목도 했다.

그러다 1998년 한국에서 온 최광 선교사를 만났다. 최 선교사는 “먹고 사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성경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선교사를 따라 나섰다. 최 선교사의 목표는 탈북 청년들을 모집해 기독교를 공부시킨 뒤 북한으로 파송해 선교한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2년을 여기 저기 옮겨 다녔다. 안전한 곳을 찾아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까지 옮겨갔다. 2000년 11월 새로운 탈북 청년들을 모집해 팀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옌지로 나왔다. 이때 천기원 선교사를 만났다.

1999년 3월 허난성 정저우에서 다른 탈북 청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시절의 김권능 씨(앞줄 가운데 흰바지). 이들 청년 중 4명이 북한에 나가 사역하다 순교했다. 김권능 씨 제공
1999년 3월 허난성 정저우에서 다른 탈북 청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시절의 김권능 씨(앞줄 가운데 흰바지). 이들 청년 중 4명이 북한에 나가 사역하다 순교했다. 김권능 씨 제공
천 선교사는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루트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엔 탈북민들이 한국으로 오는 마땅한 길이 없었다. 그는 천 선교사와 함께 2000년 12월부터 중국과 몽골 국경을 다니며 여러 개의 탈북 루트를 만들었다. 중국 남부로 내려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태국으로 가는 루트도 찾아냈다. 오늘날 한국에 온 3만 명 넘는 탈북민 대다수가 거쳐 온 그 루트를 초기에 개척한 이 중 한 명이 김 씨였다.

그는 자신이 개척한 통로로 탈북민들을 탈출시켰다. 그러다 2001년 7월 몽골 국경에서 체포됐다. 탈북민 5명으로 구성된 다섯 번째 팀을 이끌고 가던 길이었다. 국경에 하루 먼저 나가 정찰하려 했는데 그만 공안에 혼자 잡힌 것이다.

인도자가 체포되자 함께 오던 탈북민들은 당황했다. 경험이 없는 탈북민이 새 리더가 돼 중국과 몽골 국경을 넘었다. 이 과정에 일행에 포함됐던 9세 소년 철민이가 사막에서 탈진해 쓰러져 숨졌다. 영화 ‘크로싱’의 모티브가 된 바로 그 사건이었다.

김 씨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험이 없어 사막으로 너무 깊이 들어갔어요. 제가 잡히지 않았다면 철민이가 살았을 텐데 너무 안타깝죠. 한편으로 그 일행이 사막에 깊이 들어가는 바람에 체포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철민이를 제외한 일행이 한국으로 오는 동안 김 씨는 북송돼 신의주로 끌려갔다.

# 누구도 고발하지 않았다.
신의주 보위부 감옥에 들어가니 단둥(丹東)에서 배로 한국행을 시도하다 체포된 탈북민 25명이 먼저 끌려와 있었다. 그들 대다수가 김 씨를 알고 있었다.

25명조의 리더는 그와 함께 성경공부를 한 함북 무산 출신의 주복이라는 탈북민이었다. 그 외에도 김 씨와 함께 성경공부를 한 사람, 그가 탈북민을 구출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 누가 김 씨의 중국 행적을 고발했다면 그도 살아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모르는 척 외면했고, 그 덕분에 김 씨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25명 중 혹독한 취조를 견디지 못해 1명이 감옥에서 죽었고, 리더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한국으로 도망치려 했다는 죄로 19명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고 끝까지 버틴 여성 4명만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김 씨는 열악한 신의주 감옥에서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시면 평생을 저를 위해 살지 않고 탈북민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때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왔다. 단순 도강을 한 사람은 관대하게 용서하라는 내용이었다. 김 씨는 3개월 뒤 석방돼 중국으로 다시 탈북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천 선교사를 만났다. 그러나 2개월 뒤인 2001년 12월부터 시련이 시작됐다. 천 선교사가 중국 공안에 체포되된 것이다. 김 씨와 함께 천 선교사를 보조해 탈북민을 구출하던 탈북민 출신인 ‘이선생’도 체포됐다.

이들이 한국으로 보내려던 탈북민들은 졸지에 길을 잃었다. 감옥 생활로 몸도 성치 않았던 김 씨는 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양심에 부끄럽지 말자. 내가 죽더라도 이들부터 구하자.’

김 씨는 한국으로 오는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루트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체포돼 북송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자신부터 먼저 한국에 가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남았다. 다른 탈북민 먼저 구출한 뒤 자신은 맨 나중에 오겠다고 마음먹었다.

천 선교사와 이선생을 대신해 그는 탈북민들을 데리고 몽골과 베트남으로 향했다. 다섯 팀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불운이 닥쳤다. 2002년은 중국 주재 외국공관에 탈북민 집단 진입 바람이 불던 때였다. 그해 3월 베이징(北京)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탈북민 25명이 집단 진입하는데 성공한 뒤 여러 외국 공관들로 탈북민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중국 당국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중국에 숨어있던 수 만 명의 탈북민이 이때 체포돼 북송됐다.

2002년 7월 탈북민 5명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떠난 그는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에서 체포됐다. 북중 국경 변방대가 이곳까지 그들을 미행해 왔다.

김 씨는 탈북민들이 북한으로 끌려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구금되는 투먼(圖們)변방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때 이곳 수용소의 한 방에 수감됐던 탈북민들이 모두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급히 수용소 재공사가 진행되면서 김 씨는 옌지의 구치소로 이송됐다.

2003년 12월 김권능 씨(맨 왼쪽에 선 남성)가 옌볜조선족자치주 법원에서 12년형을 선고받고 있다. 당시 중국 신화통신이 “‘3.16’ 특대불법월경범죄혐의자들이 법정에 있다”라는 설명과 함께 보도한 사진이다. 김권능 씨 제공
2003년 12월 김권능 씨(맨 왼쪽에 선 남성)가 옌볜조선족자치주 법원에서 12년형을 선고받고 있다. 당시 중국 신화통신이 “‘3.16’ 특대불법월경범죄혐의자들이 법정에 있다”라는 설명과 함께 보도한 사진이다. 김권능 씨 제공


# “너는 영웅이다.”
구치소에서 한 검사가 이렇게 말했다.

“네 서류를 보니 조선에 끌려가면 무조건 죽는다. 그런데 너는 자기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네가 먼저 한국에 갈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남았다. 너는 민족의 영웅이고 나는 너를 존경한다.”

변호사들도 그를 도왔다. 그를 중국 감옥에 보내 북송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2003년 사스 광풍이 불며 재판이 지연됐다. 그해 12월 마침내 판결이 내려졌다.

중국 법에는 ‘타인을 조직하여 비법월경한 죄’ 항목에는 ‘조직한 자는 7년 이상을 선고한다’고 규정돼 있다. 그는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예상보다 많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12년은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2004년 4월 그는 장춘 테베이(鐵北)감옥으로 이송됐다.

옌지 감옥에선 좁은 감방에 22명이 머물렀다. 밤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면 사람을 밟고 가야할 정도로 빽빽하게 수감돼 있었다. 대부분 사형수 등 중범죄자들이었다. 명절 직전이면 5~6명이 불려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조용히 처형된 것이다.

그런 옌지를 벗어나 장춘으로 갔지만 사정은 나아진 게 없었다.

테베이 감옥은 무기수나 10년 이상 장기수들이 수감되는 곳. 한 방에 40명 이상 수감돼 있었다. 선풍기도 없어 여름엔 숨이 막혔고, 겨울엔 작은 창문마저 닫아 더 숨이 막혔다.

김 씨는 “그래도 중국 감옥은 신의주 감옥보다 훨씬 나았다”고 말했다.

이 감옥에서 그는 2011년 12월 19일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2004년 9월 이선생이 북송된 것은 충격이었다. 그는 김 씨보다 8개월 먼저 잡혀와 옌지감옥과 테베이감옥에서 함께 생활했다. 한족들에게 둘러싸인 감옥생활에서 둘은 서로에게 의지했다. 그런 이선생이 2005년 7월까지인 형기도 채우지 못하고 북송된 것이다. 이선생의 본명은 이수길. 1960년생으로 추정된다. 그는 북송된 뒤 기독교 조직의 리더를 지냈고 탈북민의 한국행을 주도했다는 죄로 2005년 처형된 것이 확인됐다.

그가 형기도 채우지 못하고 북송된 것은 체포된 뒤 중국에 있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 난민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둔 중국은 인권 문제가 불거질 우려를 차단하기 위해 난민 신청을 한 이선생을 황급히 북으로 송환했다.


# 감옥의 북한 마약 전사들
김 씨가 이송됐던 2004년 테베이감옥에는 탈북민을 포함해 북한 국적자만 200여명이 있었다.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탈북민도 포함돼 있지만, 북한산 마약을 해외에 팔다가 체포돼 10년 이상 형기를 받고 끌려온 북한 간부들도 여럿 있었다.

중앙당 소속 간부 1명과 북한군 소좌 2명, 보위부 상좌 1명이 대표적이다. 북한 영사관이 정기적으로 이들을 찾아와 3개월에 한 번씩 1000위안씩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김 씨는 보위부 상좌와 한 방에 있었다. 상좌는 자주 화려했던 과거를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나는 차를 끌고 중국을 합법적으로 왔다 갔다 했어. 마약 팔아 당 자금을 마련했지. 2월 16일 김정일 생일 같은 날엔 달러를 가방에 가득 채워 평양에 올라가 ‘충성자금’으로 넘겼어. 그때는 돈을 흥청망청 쓰며 잘 살았는데, 운 나쁘게 작전 중에 잡혀 이 꼴이 된 거야.”

상좌는 북한에서 ‘숨은 영웅’으로 인정받았다. 중앙당 간부와 북한군 소좌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약을 팔아 충성자금을 마련하는 임무 수행 중에 잡힌 사람들이다. 체포된 뒤에도 이들은 절대 북한 당국에서 시킨 일이 아니며 자신들은 노동자라고 신분을 숨긴다. 그러나 중국이 이를 모르진 않는다. 원래 이들처럼 큰 마약 거래를 하다 잡히면 중국에선 사형이지만, 중국 당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 사형은 시키지 않고 종신형을 선고해 감옥에 수감시켰다. 북한도 이들을 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북에 남은 가족은 배급도 꼬박꼬박 받고 당국에서 자녀들도 잘 돌봐준다.

상좌는 김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나라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보위부 사람일수록 정부를 훨씬 더 무서워해. 너희 같은 탈북민도 죽이고 싶어 죽이는 게 아니야. 지시가 떨어지니 어쩔 수 없고, 또 나라가 망하면 우리가 너희 같은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죽으니 어쩔 수 없지.”

김 씨가 형기를 마치기 2년 전 상좌는 폐암으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북한군 소좌 한 명도 병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 운명의 날
김 씨는 감옥생활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은 언제 형기가 끝날지 손꼽아 셉니다. 그런데 저는 그 반대였죠. 형기가 줄어드는 게 두려웠습니다. 북송돼 죽을 날이 다가온다는 의미였으니까요. 북한 인민을 위해 죽겠다고 맹세했지만, 형기가 끝날 때가 다가오니 삶에 대한 애착이 점점 커지더군요.”

가끔 만나는 공안 간부들은 이런 말도 했다.

“조선 보위부에서 네가 넘어오길 간절히 기다린다. 보위부에서 빨리 보내달라고 요청서류가 왔는데, 우린 형기를 채워 보낼 거야.”

그는 사형 날짜를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감옥 생활을 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옥에선 모범수라며 여러 번 감형 처분을 내렸다. 12년이 10년으로 줄어 형기는 2011년 12월 20일에 끝나게 됐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2011년 12월 19일 오전 4시 감옥 문이 열렸다. 손과 발에 족쇄를 차고 호송차에 타는 순간 그는 죽음을 맞이하려 간다는 걸 알았다. 10년 동안 감옥에서 상상해오던 순간이 막상 닥쳐오니 마음은 평온했다.

장춘 감옥에 수감된 탈북민이 형기가 끝나면 중국 당국은 저녁에 기차를 태워 투먼으로 보낸다. 그러면 아침에 도착해 북한 세관이 문을 열자마자 바로 인계한다. 그런데 그에겐 호송차와 호송원 다섯 명이 동원됐다. 사고 없이 북송시켜야 할 특별한 죄수라는 의미다.

그런데 김정일 사망이 발표됐던 12월 19일은 유난히 추웠다. 그 추위가 그의 목숨을 살렸다. 도로가 얼지 않아 오전 10시 이전에 투먼에 도착했다면 그는 북송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정일이 그의 생명을 건진 셈이다.

김권능 씨가 드디어 중국 땅을 벗어나던 2012년 4월 17일 연길공항의 풍경. 김권능 씨 제공.
김권능 씨가 드디어 중국 땅을 벗어나던 2012년 4월 17일 연길공항의 풍경. 김권능 씨 제공.
# 석방
2011년 12월 20일 그는 8년 만에 옌지 구치소에 다시 들어갔다. 감옥 간수들은 “북조선 새끼가 잡혀왔네”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며칠 뒤에 들어온 관리는 태도가 달랐다.

“너의 기록을 쭉 봤다. 너는 조선에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족도 모두 한국에 있다니 한국 정부에 가족관계증명서를 만들어 보내달라고 요구해 봐. 그럼 우리가 도와줄 여지가 있다.”

김 씨가 수감 생활할 때 아버지와 남동생은 탈북해 한국으로 먼저 왔다. 동생이 통일부에 찾아가 서류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공신력 있는 서류를 만들어오지 못하자 중국 관료가 다시 제안했다.

“그럼 가족의 머리카락을 보내. 우리가 유전자 검사를 해서 가족관계를 증명해줄게.”

결국 통일부가 해주지 않은 서류를 중국 간부가 탈북민에게 유전자 검사까지 받아 만들어주었다.

2012년 3월 16일, 간수가 김 씨를 불렀다.

“어디로 가냐”고 묻자 “조선에 가지 어딜 가겠나”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모든 노력이 무위에 돌아간 거라 생각해 아찔했다.

그러나 김 씨가 끌려간 곳은 법정이었다. 법관이 그에게 “어딜 움직이는 경우 꼭 공안에 보고한다”는 조건을 달아 석방 판결을 내렸다. 그의 신분은 무국적자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상상하지 못했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10년 만에 거리에 나왔다. 숨을 쉬며 걷는다는 게 꿈만 같았다. 한 달 뒤인 4월 17일 아시아나항공 편으로 옌지공항에서 인천으로 날아왔다.

옌지공항 보안책임자는 10년 전 정저우까지 쫓아왔던 변방대 체포조 책임자였다. 김 씨가 드디어 풀려나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등고 공항에서 김 씨를 배웅하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막상 당일엔 급한 일이 생겨 나오지 못했지만 대신 부하들을 보냈다.

부하들이 김 씨를 보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부터 잘 살기를 바란다”며 격려했다.

김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공항에서 엄청 긴장했죠. 비행기가 떠서도 중국 상공에 있을 때는 불안했어요. 언제든 회항해 중국 땅에 내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창밖으로 서해 바다가 보일 때 비로써 저는 ‘이젠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었어요.”

한국의 조사기관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왔느냐, 보위부에 체포됐을 때 매수된 거 아니냐”는 질문을 집요하게 받으며 남들보다 훨씬 오래 조사를 받았다.

2012년 9월 6일 그는 드디어 하나원 문을 나섰다.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지난해 10월 17일 목사 안수를 받은 김권능 씨(왼쪽)가 남동생과 조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김권능 씨 제공.
지난해 10월 17일 목사 안수를 받은 김권능 씨(왼쪽)가 남동생과 조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김권능 씨 제공.


# 삶의 의미
김 씨는 지금 인천의 한 탈북민 집단 거주지역에 ‘인천한나라은혜교회’라는 개척교회를 만들고 목사로 재직 중이다. 40여명의 교민들도 대다수 탈북민이다.

김 씨는 총신대학교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모 대학 신학 박사 과정을 다니고 있다. 같은 탈북민을 만나 결혼했고 아들 셋을 두었다. 막내는 지금 8개월이다. 26세에 체포돼 36세까지 중국의 혹독한 감옥 생활을 이겨내고 찾은 행복이다.

“체포돼 1년이 지난 어느 겨울에 재판 받으려 호송버스를 타고 연길 거리에 나섰어요. 처음 감옥 밖으로 나온 거죠. 문뜩 어느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불며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장면이 왜 그렇게 평안하고 행복해 보이던지…. 감옥에서 10년 내내 계속 그 장면을 떠올렸어요. 밖에 살 땐 추위가 싫었어요. 하지만 그때 평범한 순간이 누구에겐 얼마나 소중할 수 있는 지를 깨달았어요.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위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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