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버리고 평화 택하라는 명확한 신호 보내라 [우아한 청년 발언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3일 14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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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노동신문
사진 출처 노동신문
북한 정권의 목표가 정권유지라는 점에는 아마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정권은 두 가지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야 한다. 첫 번째는 외부의 적이다. 적대세력인 미국·한국에 맞서기 위한 군사적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고 강력한 공세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적은 내부에 있는 잠재적인 불만세력이다. 모든 독재 정권들이 그렇듯이, 김정은 역시 매일 밤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염려하면서 잠자리에 들 것이다. 당연히 북한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해질수록 불만은 증대되어 위험수준에 이르게 된다. 인민의 봉기를 막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김정은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고, 집권 이후 북한 경제 회생에 많은 힘을 쏟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의 기대와 달리, 코로나19에 제재까지 겹친 북한 경제는 현재 매우 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 정부는 방역을 위해 모든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는 초강경 대책을 펴고 있다. 그리고 북-중 국경봉쇄는 북한의 가장 큰 수입원인 대 중국 무역액을 급감시켰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한 제재로 인해 무역 적자액은 2018년 20억 달러를 기록한 후 점증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재난과 제재의 이중고는 북한 경제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무역을 양방향으로 쪼그라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올해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8~10%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에 필적하는 위기다. 최근 북한이 문제 삼은 대북전단은 구실에 불과하다. 김정은의 속을 타들게 하는 것은 전단이 아니라, 무너지는 경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이 경제적 위기를 전쟁으로 타개하려 할까. 아마 북한 정권은 군사적 파국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핵을 가졌다고 해도, 전면전에 나설 경우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한미연합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는커녕 개전 며칠 만에 수뇌부의 생명마저 위태롭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평화가 정착되는 것도 달갑지 않아 할 것이다. 평화가 불러오는 완화기로 외부세력과 내부세력이 손을 맞잡게 된다면 정권의 안위에 위협적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북한 정권은 전쟁도, 평화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적절한 긴장 가운데 지금의 상태가 지속되는 현상유지(status-quo)다. 그들에게는 전쟁과 평화 그 양극단 어디로든 수렴하지 않는 가운데, 적절히 긴장을 유지하는 ‘정권안정성의 골디락스(Goldilocks)’가 필요하다. 이렇게 김정은은 군사와 경제를 이용해서 외부와 내부의 적들에 맞서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중이다. 대화와 도발이라는 북한의 이중전술과 그에 따른 남북관계의 주기적 파동은 여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북한은 정치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대남, 대미 군사 도발과 위협을 통해 경제제재를 해제하라는 위협적 메시지를 미국에 보내왔다. 남한에 대해서는, 극한 대치로 위기상황을 조성한 뒤 협력 카드를 내밀며 경제적인 이득을 요구해 왔다. 미국에 안보를 보장받고 경제제재를 해제시킨 그 다음 출구에서는, 남한의 경제력을 동원해 국내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려 해 온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심대한 고통을 받고 있는 지금, 북한 정권은 정치적 공갈을 동원해 남한을 볼모로 잡고, 핵에 민감한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핵을 가진 채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것이 핵심 목표일 것이다. 북한은 올해 개성공단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함으로써 이의 설치를 명시한 재작년 4월 남북정상 간 판문점 선언을 파기해 버렸다. 남한을 ‘철면피한 감언이설으로 신의를 배신한 천하의 망동 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남한 정부가 평화의 언약을 어기고 대북전단이라는 도발을 했으니, 약속의 상징인 연락사무소를 무너뜨린 것은 사실상 남측이라는 게 북한의 논리처럼 보인다. 김여정은 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남조선당국의 집요하고 고질적인 친미사대와 굴종주의’ 때문에 남북관계가 미국의 농락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남한은 미국의 괴뢰(傀儡)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북한은 이어 대북전단 살포를 가능하게 한 것은 미국 정부의 탈북민 단체 지원이라며 이 문제를 북미 간 대결 구도 조성에도 활용하고 있다.

이런 북한을 정부는 대화와 포용의 상대로 상정하고 갖은 배려를 베풀어 왔다. 최근 정부는 북한이 요구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경협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여당에서는 보건협력, 수해복구협력과 함께, 때늦은 종전선언 체결방안까지 나오고 있다. 긴장관계의 지속 속에서 통일부장관은 대북 인도주의 사업을 의결하기까지 했다. 남북 간 긴장이 점차 고조되던 이번 1월에는, 남한이 먼저 나서 개별 관광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북한을 경협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의 노력이, 북한 정권이 군사적 조치를 버리게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럴 유인이 없어지도록 만들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른바 ‘핵을 가진 평화(nuclear peace)’는 우리에겐 재앙이나 다름이 없다. 김정은이 핵을 버리고 평화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현상유지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평화에 대한 불안을 상쇄할 만한 더 큰 실질적 타격이 가해져야 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경제제재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무기이다. 하노이에서 김정은은 제재 완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 하지만 개별관광 등의 허용으로 외화를 벌 수 있게 되어서 무장해제 없는 제재 완화가 가능하다면, 북한 정권이 핵을 내려놓을 이유가 없다. 현재의 긴장 상황에서의 경협은 대북 경제제재의 효과를 반감시켜 북한 정권이 핵을 유지하는 비용을 낮출 뿐이다. 김정은의 핵 매도 호가는 더 많이 높아지게 되고, 그때는 지금보다 높은 비용을 치르기는커녕 핵무장 자체가 비가역적인 일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와 미래세대에게 더 큰 실질적 위협으로 돌아올 것이다. 평화를 위한 정책이, 평화를 해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우리가 북에 보내야 할 신호는, 변함없는 순정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전략적 판단이다. 물론 협력도 남북관계의 장기적 국면에 있어 매우 필수한 것이지만, 전략이 부재한 지금은 북의 정권안정성 확보의 재료로만 쓰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남북한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김정은과 김여정의 흔들기에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고 카운터파트로서 존중받기 원한다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진한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도발과 대화 사이에서 진동하는 북한 정권의 패턴을 잘 읽고, 핵과 평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유도해 나가야 한다. 흔들리는 평화로는 우리는 물론 우리 아들 딸의 아들 딸까지도 더 엄혹한 세상을 살아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세호 서울대 경제학부 16학번(서울대한반도문제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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