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북한 보위부는 탈북 기자가 왜 두려운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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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보위부에 납치된 탈북자 고현철 씨가 지난달 15일 평양에서 “유인납치의 진상을 밝힌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북한 보위부에 납치된 탈북자 고현철 씨가 지난달 15일 평양에서 “유인납치의 진상을 밝힌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올해 입국한 대학 후배를 만났다. 통일전선부(통전부)에도 있었다는 그는 북에서 내 이름을 알았다고 했다. 통전부야 매일 한국 언론을 볼 것이니 남쪽 기자 이름을 아는 건 놀랍진 않았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통전부에선 주성하가 어떻게 평가되나요. 북한을 배신한 악질반동?”

“절대 아닙니다. 거기 사람들도 체제의 문제점을 아니까 사실에 기반한 비판은 수긍할 수 있죠. 통전부는 거의 다 김일성대 출신들인데, 속내는 오히려 동문이 남쪽에 나가 성공했다고 보는 것 같아요.”

물론 후배가 나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한 가지는 확신한다. 매일 한국 신문을 본다면 김정은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통전부는 탈북자 10여 명의 북한 행적을 폭로한다며 ‘인간 쓰레기’와 같은 험한 용어로 온갖 인신공격을 퍼붓는 글과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 등에 공개했다. 하지만 남쪽에 오자마자 기자가 돼 14년간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수없이 써온 나는 공격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신은 봐주는 거 아니냐”는 말도 들을 때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때를 묻힐 사이 없이 오다 보니 욕할 건더기가 없겠죠”라고 대답하면서도 실은 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지난달 16일 노동신문에 내 이름이 10번이나 오르내렸다. 북한이 5월 27일 체포한 탈북자 고현철 씨의 기자회견을 통해서였다.

고 씨는 “주성하 놈은 ‘동아일보’ 기자의 탈을 쓰고 미국과 괴뢰정보원의 막후조종을 받으며 우리(북) 주민들에 대한 유인납치 만행을 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폭로’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주성하 놈은 미국과 남조선의 유인납치 단체들 사이에 자금을 중계해주고 연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잰 숄티의 ‘디펜스포럼’은 남조선의 ‘북 인권’ 단체들을 배후조종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반공화국 모략단체인데 주성하는 바로 이 단체와 연결돼 있다.”

“5월 어느 날 주성하 놈이 나에게 ‘우리는 직업적으로 모든 일을 박근혜 정부의 안정을 보장하는 방향에서 고찰하고 진행하여야 한다’고 했다.”

직접 당하고 보니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단 한 번도 미국의 자금을 중계한 적도, 수잰 숄티를 만나거나 통화한 적도 없다. 고 씨를 만나 본 적은 있지만 5월엔 만난 일이 없다.

북한 내부 소식을 알 수 있는 선이 있다고 해서 올 3월 28일 회사 근처 낙지 요리전문점에서 그를 처음 만나 저녁을 먹었다. 그 뒤엔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다. 그가 고문에 못 이겨 내 이름을 댔을 수는 있지만, 그걸 갖고 현직 언론인을 엮는 수법은 너무 치졸해 헛웃음만 나왔다.

기자회견장에서 고 씨는 나를 언급할 때마다 유난히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자주 내려다보았다. 써준 각본을 미처 외우지 못한 것 같았다. 보위부가 고 씨의 휴대전화에서 발견한 여러 ‘반동’들의 얼굴이라며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공개한 사진 중에는 내 얼굴도 있었다. 다른 사진들은 다 배경이 있어서 휴대전화로 촬영했다고 우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사진은 바로 이 칼럼에 실었던 프로필 사진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 끼워 넣을 정도로 나를 함께 엮고 싶었나 보다.

나는 이번 북한에서의 기자회견이 통전부가 아닌 국가안전보위부의 작품이란 점에 주목한다.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한국으로 망명한 뒤 북한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눈이 뒤집힌 시점임을 감안하더라도 보위부는 정말 저질스러웠다.

고 씨 기자회견을 북한 매체들이 분노한 인민의 반향이라며 잇달아 내보내는 것을 보니, 경고의 의미로 전 주민에게 기자회견을 보게 한 것 같다. 그 덕분에 내 이름은 모략꾼의 이미지이긴 하지만, 북한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것 같다.

기자회견에서 다른 탈북자들은 ‘죄를 짓고 도주한 쓰레기’니 뭐니 했지만 나에 대해선 탈북자란 사실을 일절 밝히지 않았다. 이를 통해 나는 동아일보에 탈북 기자가 있다는 사실은 북한이 주민들에게 숨겨야 할 비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탈북자도 남쪽에서 대표적인 언론사의 기자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성공 신화처럼 받아들일까 봐 두려운 것이다.

북한은 기자회견 며칠 뒤엔 대남방송에 혈육까지 등장시켜 내게 보내는 편지란 것을 읽게 했다. 허나 북한은 내가 왜 남쪽에 와서 언론인이란 직업을 선택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북한 인민이 자유롭고 풍요롭게 사는 날까지 그들 편에 서 있겠다는 맹세는 내가 북한을 탈출한 동기이자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신념이다. 날 흔들려는 북한의 비열한 이번 공격은 어떠한 살해 협박과 중상모략 속에서도 내가 이 자리에서 끝까지 버티고 서 있는 것 자체가 북한 독재 정권과 치열하게 싸우는 일이라는 믿음을 보다 굳세게 만들어 주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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