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집권 후 4년 중임제와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 강화 등을 포함한 여러 과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해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지금이 개헌 골든타임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직전인 2012년 11월에 발표한 공약이다. 박 대통령이 말한 ‘국민적 공감대’는 확보돼 있다. 적어도 개헌 필요성에 대해서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와 20대 국회 들어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개헌 논의가 이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개헌 시기는?
현행 헌법은 1987년 ‘독재 타도’를 내세운, 사실상 시민혁명 상황에서 탄생했다. 혹자는 ‘지금이 정치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국민 불신·불만이 혁명 직전 상황’이라고 말하지만, 혁명적 상황이 다시 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개헌을 하려면 헌법상 발의와 공고, 공포의 주체인 대통령의 의지가 관건이다.
박 대통령은 개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개헌 얘기가 나올 때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고 입을 막았다. 입장을 바꿔보면 박 대통령의 공약 파기도 이해는 된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어떤 최고 권력자가 ‘대한민국을 바꿔보겠다’는 열정에 충만한 임기 초에 개헌이라는 블랙홀에 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과도기 대통령’ ‘과도기 정권’으로 밀려나려 하겠는가. 누가 대통령이 되든 차기 정부 임기 초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는 이유다.
그래서 바로 지금이 개헌의 골든타임이다. 전임 대통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임기 후반에 개헌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그때마다 ‘권력 연장’ 의도라는 비판에 직면했지만, 나는 꼭 그렇게만 보지는 않는다. 대통령이라는 국가 정점에 오른 순간 대개는 사심을 버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종교에 빠진다. 의욕적으로 해보려다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때가 임기 후반이 아닐까. 하지만 그때쯤이면 대권 고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미래권력이 개헌을 양해해줄 리 없다.
지금은 어떤가. 대선이 1년 반밖에 안 남았지만 가시권엔 미래권력이 안 보이고, 미래권력이 아닌 현재권력이 개헌에 반대하는 희귀한 경우다. 박 대통령은 4월 언론사 편집·보도국장과 만났을 때 개헌에 대해 “경제가 살아났을 때 국민들의 공감대를 모아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논의의 문은 열어놓았다. 초를 치는 것 같지만 여대야소(與大野小) 정국에서도 실패한 경제 살리기가 여소야대에서 될까. 이미 한국 경제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Brexit·브렉시트) 전망에도 증시가 출렁거릴 정도로 세계 경제와 연동돼 있다. 무엇보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구조를 바꿔놓지 않는 한 요원한 일이라고 나는 본다.
박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보다는 ‘경제를 살리는 구조’로 정치의 판을 바꾸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했으면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공화정으로는 거대해진 로마의 경영이 더 이상 어렵다는 것을 간파하고 사실상 제정(帝政)을 시행했다. 결국 ‘독재자’라는 이유로 암살됐지만 ‘팍스 로마나’의 기틀을 잡았다.
“추진 반대 안 해” 표명해야
물론 개헌은 대통령이 나선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다만 박 대통령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 국회에서 추진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정도로 입장 표명만 해도 엄청난 동력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개헌에 최적화된 정치상황은 다시 오기 어렵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박 대통령은 물론 기성세대는 역사와 후손에 죄를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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