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의 프리킥]4·13총선의 시대정신은 ‘절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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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논설위원
허문명 논설위원
지난 역사에서 선거는 한 시대를 갈음하고 새 시대를 여는 민심의 분출장이었다.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국민의 항거가 선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맞물리며 자유민주주의를 확장해 온 역사다. 경제가 고도의 압축성장을 이룬 것처럼 정치도 짧은 기간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군정 종식, 안정이냐 개혁이냐 어젠다를 거쳐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에는 민심이 경제 쪽으로 이동했다. 최근엔 안보, 종북도 중요한 어젠다로 떠올랐다.

“국회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문제는 정치가 갈수록 국민 기대 수준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8대 총선에선 투표율이 사상 초유로 50%에 미달(46.1%)했고, 19대 총선도 18대보다는 높았지만 대선 전초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치에 크게 못 미쳤다(54.3%). 정치 무관심과 냉소가 확산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도 반전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선거에서는 시대정신이 표출된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이번 총선의 시대정신은 뭘까? 새로운 이슈나 인물이 보이지 않는 이번 선거의 시대정신은 한마디로 ‘절망’이라 말하고 싶다. 여간 친한 사이 아니면 정치적 견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투표장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이번처럼 많이 들은 적이 없다. 정치 혐오와 최저 투표율을 걱정하는 소리도 어느 때보다 높다. 특히 젊은층의 무관심과 ‘극혐(극도 혐오)’은 심각한 수준이다.

택시 기사들에게 선거 민심 물어보기가 겁날 정도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국회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같은 극단적 분노를 실은 답이 돌아오기 일쑤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종편의 출현으로 정치에 대한 정보가 흘러넘쳐 국민은 선진국 수준의 정치 비전을 요구하지만 정치인들의 행태는 최소한의 상식이나 예의를 저버린, 시정잡배보다 못한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여당 공천 과정에서 막장·파벌이란 단어가 이토록 휩쓴 적이 있었나 싶고 더불어민주당의 ‘친노 운동권 문화 척결’도 기대하기 힘들 듯하고 안철수 ‘새 정치’도 빛바랜 지 오래다.

저성장 저고용 저출산 고령화 고부채… 대한민국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게 된 지 꽤 됐다. 김정은은 수시로 미사일을 쏴대고 핵 위협을 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고 중년들은 은퇴 이후 생계가 걱정이며 노년층은 하루아침에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까 전전긍긍이다. 외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한국으로 직장을 옮긴 한 대학교수는 “한국은 결국 여기까지(중진국)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낡은 리더와 세력과의 대결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 했다. 지금 어느 정치 지도자도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야당 핑계를 대고 야당은 대통령 깎아내리기와 비난뿐이다. 여야가 내놓은 공약들도 ‘지원, 혜택, 경감’이 주종이다. 국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자기네들 표를 위해 몇십조 원씩 쓰겠다니 이보다 더한 도둑질이 어디 있는가.

역대 총선에선 미래 리더들이 등장해 선거를 주도했지만 이번 선거는 낡은 리더인 현직 대통령과 낡은 세력 친노가 공천을 주도했다.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끌고 갈 20대 국회도 결국 뻔할 것이란 생각만 든다. 미래를 끌고 갈 다음 대통령 후보감도 잘 보이지 않는다. 4·13 시대정신을 ‘절망’이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413총선#키르케고르#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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