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영유아-취약계층 콕 찍어 지원할 국가전략 짜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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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의 숨겨진 굶주림]<下>국내외 전문가 맞춤형 모델 제안

‘아이가 낮이든 밤이든 집 안이나 밖에서 하루에 먹은 모든 것에 표시해 주십시오. 죽 빵 밥 국수 등 곡물 식품/감자 및 감자로 된 식품/콩 완두 견과류 또는 씨로 만든 식품/후추 파슬리 간장 마늘 생선가루 같은 양념….’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과 세계식량기구(WFP),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해 말 북한 영유아 및 임산부를 대상으로 영양실태 합동조사를 하면서 사용한 설문지 내용의 일부다. 22종류로 세분된 식품군이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제시돼 있다. 야채도 황색채소와 녹색채소로, 유제품도 우유와 치즈 등으로 일일이 구분돼 있어 시험을 치듯 꼼꼼하게 적어야 한다.

국제기구들은 북한의 ‘히든 헝거(Hidden Hunger·숨겨진 굶주림)’를 찾아내기 위해 이처럼 세심한 모니터링을 통한 분배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내외 전문가들은 “영유아 등 취약 계층의 빈곤과 필수영양소 결핍 같은 히든 헝거를 해소하려면 그 대상에 맞는 ‘맞춤형 지원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노 액세스 노 푸드’ 원칙 세워나가야

유니세프는 8월 한국 정부가 집행을 의결한 604만 달러의 대북 지원금으로 북한에 영양치료식과 의약품 등을 전달하기 위한 절차에 최근 착수했다. WHO도 정부가 지난달 26일 의결한 680만 달러의 자금 집행을 곧 시작할 예정이다.

국제기구들은 이 과정에서 엄격한 모니터링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No Access No food(접근할 수 없는 곳에는 지원하지 않는다)’의 원칙을 입버릇처럼 언급한다. 평양에 상주하는 디르크 슈테겐 WFP 북한사무소장은 “7명의 WFP 인원이 1년 내내 북한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모니터링을 한다”며 “예전에는 우리 직원들이 북한말을 잘 몰라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문제는 한국 교포나 3세를 채용하는 것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WFP가 제공하는 고영양 식량은 보관 박스뿐만 아니라 내용물에도 선명한 로고가 찍혀 있기 때문에 장마당(북한의 시장 격) 등으로 빼돌릴 수 없다고 덧붙였다.

WFP는 최근 대북 지원의 명칭을 ‘대규모 식량 지원’에서 ‘푸드 어시스턴트’로 바꿨다. 북한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영양식을 북한 내부의 공장에서 직접 생산해 지원하는 방식이라는 뜻을 앞세워 식량의 전용(轉用) 우려를 불식하려는 의도다.

유니세프의 크리스토퍼 드 보노 아시아지역본부 홍보담당 본부장은 “북한에 들어가 있는 유니세프 팀 전체가 ‘노 액세스 노 푸드’의 원칙에 따라 매우 집중적이고 엄격한 모니터링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니세프는 영양식 지원 대상인 탁아소나 보육원에 제대로 전달됐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어린이들의 키와 몸무게, 팔뚝 굵기를 정기적으로 체크한다. 가정집을 가가호호 방문해 설문조사하는 방식도 병행한다.

○‘히든 헝거’에 맞는 맞춤형 지원 모델 필요

국제기구들은 짧은 기간에 수시로 진행하는 모니터링 외에 정기적으로 북한식량 실태와 영유아 등 취약계층의 영양 상태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한다. 매년 식량실태 보고서를 내온 WFP와 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달 27일부터 2013년도 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기후와 작황은 물론이고 곡물 수입량, 환율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각종 통계 및 분석, 수치를 동원해 완성하는 보고서는 언뜻 보면 난해한 수학 논문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상세하다.

이들이 북한의 산간지역 등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본 뒤 작성하는 보고서는 국제사회가 대북 식량지원 예산을 배정하는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의 외교부와 통일부 당국자들도 열독하는 자료다.

그러나 국제기구들이 철저하다고 자부하는 실태조사와 모니터링 결과조차 때론 정확도 등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정도로 통제가 심한 북한 내부를 들여다보기는 쉽지 않다.

결국 정확한 진단을 바탕으로 취약계층별 맞춤형 지원 모델을 만들어서 강화해 나가는 것이 ‘히든 헝거’ 해결의 핵심 방안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통일연구원 이금순 연구원은 “대북 지원에 있어서 타깃을 좁혀야 할 필요가 있다”며 “북한 어린이도 3세 이하인지, 5세 이하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선택하고 집중해야 현실적인 대응 방안도 나오고 그 효과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여상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소장은 “2년 주기로 지원품목과 수량, 시기를 예고해 집행하되 북한이 협조하지 않으면 중단하는 식의 ‘인도적 대북지원 사전 예고제’도 히든 헝거 해결을 위한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단계별 맞춤형 안보 전략을 짜듯이, 히든 헝거에 대해서도 계층별, 지역별, 수준별 맞춤 정책을 정부가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윤지현 교수는 “곡물 같은 탄수화물 섭취가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고 해도 뇌를 비롯한 신체발달에 필수적인 미량영양소 공급에 신경을 써야 한다”며 “이런 부분까지 적극적으로 챙겨야 통일 후 남북어린이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은·김철중 기자 lightee@donga.com
#영유아#취약계층#국가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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