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청장으로 발탁됐지만 18일 “맡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황철주 전 내정자가 자신이 경영하는 경기 광주시 오포읍 주성엔지니어링 본사에서 기자간담회를 마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광주(경기)=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주식 백지신탁은 창업자가 공무원이 될 수 없게 하는 법이더군요. 이 제도가 존속한다면 앞으로 중소기업 출신 공직 최고경영자(CEO)는 나오기 힘들 겁니다. 창조경제가 성공하려면 법과 제도부터 바꿔야 합니다.”
황철주 전 중소기업청장 내정자가 꼽은 사퇴 이유는 ‘주식 백지신탁’ 제도였다. 공직자의 정책 결정에 공정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2005년 도입된 이 제도가 취지와는 달리 혁신인사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18일 경기 광주시 오포읍 주성엔지니어링 본사에서 공식 사퇴 의사를 밝힌 그를 따로 전화 인터뷰해 속사정을 들어봤다.
○ “창업자가 공무원 될 수 없는 법”
황 전 내정자는 “창업자가 힘들게 키워 온 회사의 지분을 금융기관이 상의도 없이 매각해 버리는 주식 백지신탁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중기청장의 역할이 대한민국 산업 생태계를 살리라는 것인데 내 기업 생태계도 못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느냐”고 하소연했다.
황 전 내정자는 주성엔지니어링의 지분을 25.5% 보유하고 있다. 18일 종가(6240원)로 계산하면 655억 원에 이른다. 배우자는 1.8%(45억 원 상당), 형은 0.6%(16억 원 상당)의 지분을 갖고 있다. 현행 공직자윤리법 및 시행령에 따르면 이들은 주식을 내놓아야 한다. 주식 백지신탁 심사위원회에 직무관련성 심사청구를 할 수도 있지만 중기청장이 주성엔지니어링의 주주를 겸해도 된다고 평가받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한 벤처기업 CEO는 “현장경제를 잘 아는 기업인들이 공직을 맡을 수 있는 길이 사실상 원천봉쇄된 것”이라며 “회사를 잃으면서까지 공직에 나서려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현행 주식 백지신탁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공무 집행의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취지는 살리되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헌법재판소는 국회의원의 주식 백지신탁과 관련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위헌을 주장했던 이강국 전 헌재 소장 등은 “공직자 임기 중 주가 상승분이 있는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이를 모두 환수하면 입법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 “검증동의서 낸 지 하루 이틀 뒤 내정”
황 전 내정자의 사퇴에는 청와대의 엉성한 인사검증 체계도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지난주) 수요일, 목요일쯤 신원조사에 동의하라며 전화가 걸려와 팩스로 검증동의서를 보냈는데 금요일 오후 뉴스를 통해 내정 사실을 알았다”며 “청와대가 내정 사실을 통보하면서 ‘주식을 1개월 내에 매각하거나 신탁하면 된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공직에 있는 동안만 경영권을 포기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검증 작업이 하루 이틀 만에 ‘속성’으로 이뤄진 데다 내정자에게 사전 절차조차 정확히 일러주지 않았다는 얘기다.
윤태범 한국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교수는 “고위 공직자의 자질과 검증 대상 항목을 규정하는 제도가 없다 보니 불거진 일”이라고 꼬집었다.
기대가 컸던 벤처업계는 실망감을 나타냈다. 박창교 벤처기업협회 부회장은 “중소 벤처업계의 사정을 잘 알고 있고 현장 경험이 많은 분이 내정돼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한편 청와대는 중기청 업무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곧바로 후임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후임으로는 김순철 현 중기청 차장, 중기청 차장을 지낸 송재희 중소기업중앙회 상근부회장 등이 거론된다.
:: 주식 백지신탁 ::
고위 공직자와 국회의원 등이 직무와 관련 있는 회사의 주식을 3000만 원어치 이상 소유하고 있는 경우 본인 및 배우자, 직계가족의 주식을 금융회사에 맡기도록 한 제도. 금융회사는 이 주식을 원칙적으로 60일 이내에 처분해야 한다. 공직자가 스스로 주식을 매각할 수도 있다. 신탁이나 매각을 피하려면 주식백지신탁 심사위원회에 청구해 직무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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