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여자가 총리? 독일이 뒤집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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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음모와 술수의 지난(至難)한 가시밭길을 건넌 자의 손에만 들어오는 법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권력을 놓고 싸우는 정치는 가슴보다 머리가 우선이다. 일찍이 이런 권력의 속성을 간파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513년 ‘군주론’에서 “군주는 여성스럽고 결단력이 약하다는 모습을 절대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후 500년이 흘렀지만 리더는 ‘강한 아버지’ 같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와 권력의 속성은 한결같다. 여성 정치 지도자는 되기도 어렵지만 집권한 뒤는 더 어렵다. 그래서일까. 남자보다 더 많은 난관들을 극복하고 최정상에 오른 그들이 남긴 빛과 그림자 또한 훨씬 강하고 짙다.

“메르켈이 총리가 되는 건 막아야 합니다”

박빙으로 전개되던 2005년 9월 18일 독일 총선 직전, 독일 한 신문사의 중진 언론인 A 씨는 기민당(CDU) 소속 중진 정치인들로부터 쏟아지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리 앙겔라 메르켈 기민당 대표가 총리 후보라지만 국가의 수장을 뽑는데 ‘여성 총리’가 말이 됩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메르켈이 총리가 되는 건 막아야 합니다. 저와 제 동료들의 생각이 모두 같습니다.”

메르켈 총리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A 씨의 회고다. “기민당 출신 전직 장관들부터 주지사들까지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중도 좌파 사민당 소속)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도 내게 ‘여자는 총리로 안 된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와 친분이 깊었던 내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정치권 내 여론이) 오죽했겠습니까.”

2009년부터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4년 연속 선정됐고, 당분간 그 자리를 고수할 것이 유력한 메르켈 총리. 불과 4년 전 총리직에 오를 때의 믿기지 않는 독일 정가의 뒷모습이다.

여왕이 여러 차례 통치한 영국과 달리 독일은 여성이 통치한 전례가 없다. 그런데 동독 출신의 물리학자, 목사의 딸로 성장한 개신교도, 두 번의 결혼을 하고도 자식이 없는 메르켈이 독일의 첫 여성 총리에 올랐다. ‘정치란 법대를 나온 남자들의 전유물’이라 여기고, 가톨릭을 배경으로 한 보수주의 정당 기민당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었다.

메르켈은 ‘헬무트 콜 전 총리의 정치적 양녀’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실은 기민당의 심장에는 접근하지 못한 여자 정치인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진정한 이너서클에서 배제됐던 메르켈은 그 덕분에 콜 전 총리의 비자금 스캔들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운 정치인이 됐고, 기민당의 개혁을 원한 일반 당원들의 지지로 당 대표가 됐던 것이다.

메르켈이 총리가 되는 걸 보면서 기민당의 남성 정치인들은 30년 전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대처는 보수당 정권 시절 주택, 재무, 교통, 교육부 등 여러 부의 장관을 맡았지만 정작 총리가 된 것은 우연과 운이 결정적 작용을 했다. 에드워드 히스 보수당 대표가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유력한 후계자였던 키스 조지프가 말실수로 대표 경선 출마를 포기하면서 대처는 1975년 보수당 대표에 당선됐다. 그는 4년간의 야당 대표를 거쳐 총리에 올랐고, “여성이 총리 역할을 잘할 수 있겠느냐”는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냉전 시대에 11년 동안 영국을 다스렸다.

대처와 메르켈은 경제 위기에 빠진 국가, 수렁에 빠진 당에서 기회를 잡은 여성 정치인의 선두, 남성적인 리더십과 질긴 생명력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 메르켈 취임후 여성총리 새 단어 ´Kanzlerin’ 생겨 ▼

총리실 인터넷 주소도 여성형으로 바뀌어


대처재단의 연구팀장 겸 대변인인 크리스토퍼 콜린스 씨가 기억하는 일화. “대처는 총리가 된 뒤에도 거의 스스로 요리를 했다. 그런데 관저인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부엌이 좁았는지 하루는 ‘옆집 11번지는 부엌이 꽤 넓던데 부럽네요’라고 말하더라.” 11번지는 내각의 2인자인 재무장관 관저다. 대처 총리가 관저를 고치지는 않았다.

메르켈 총리는 집무실 바로 위 8층의 아파트형 관저를 전혀 이용하지 않는다.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맞은편의 암 쿠퍼그라벤 거리 6번지 건물 5층의 사저를 계속 쓴다. 그는 시간이 날 때면 직접 가까운 슈퍼나 백화점을 들러 장을 본다고 한다.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의 해산물 코너에서 메르켈 총리를 만났던 한 지인의 말. “총리는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이리 잠깐 오시라’고 했다. 그러더니 ‘이 생선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늘 생선 요리를 해야 하는데 고민이다’고 말했다. 그녀는 시장에선 그냥 평범한 주부다.” 남성 총리가 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취재차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메르켈 총리의 사저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을까 싶어 건물을 찾았던 기자는 깜짝 놀랐다. 건물 앞에는 단 한 명의 경찰관도 없었다. 건물에서 30m쯤 떨어진 곳에 경찰차 한 대가 있을 뿐이었다. 입구에는 출입문 옆 인터폰을 누르는 곳에 메르켈의 남편인 ‘Prof. Dr. Sauer(자우어 교수)’라고 쓰인 작은 이름표만 있을 뿐이었다.

여성 지도자가 등장한 뒤 새로운 단어들도 생겨났다. 독일어로 총리를 뜻하는 ‘Kanzler(칸츨러)’의 여성형 명사인 ‘Kanzlerin(칸츨러린)’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총리실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도 www.bundeskanzler.de에서 www.bundeskanzlerin.de로 바뀌었다. 영국에서는 총리의 남편을 뜻하는 ‘퍼스트 젠틀맨(First Gentleman)’이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가장 큰 변화는 경호

첫 여성 대통령을 맞은 한국은 변화의 폭이 더 클 것 같다.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는 경호. 대통령 경호실은 지난해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승리한 직후 처음으로 ‘여성대통령 경호 직무 교육’을 실시했다. 대통령 경호의 제1수칙인 ‘대피 조치(괴한의 습격 등 돌발 사태 발생 시 대통령을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위험 지역에서 대피시키는 것)’에 대한 내용부터 달라진다. 지금까지는 대통령 근접 경호 중인 경호관들이 대통령의 어깨를 양손으로 강하게 붙잡고 안전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게 기본이었다. 박 대통령의 경우 대피 조치 시 여성 경호관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대통령의 어깨를 어떻게, 또 얼마만큼 강하게 잡고 대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재논의가 불가피하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었고, 자신도 2006년 지방선거 유세 중 ‘커터칼 테러’를 당한 ‘피습 트라우마’가 있는 만큼 청와대는 돌발 상황을 대비한 경호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청와대 본관 앞 경호실 전용 체력단련장인 연무관에서는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주변의 소리에 따라 권총을 발사하는 사격 대응 훈련이 집중 실시되고 있다. 주변에 총 소리, 풍선 터지는 소리, 타이어 터지는 소리 등 총 소리와 유사한 다양한 소리를 잇달아 들려주면서 진짜 총 소리에만 권총을 뽑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주로 사용할 공간과 각종 집기도 여성 대통령에 맞게 교체를 준비 중이다. 대통령이 수시로 사용하는 메모지의 이름이 이미 이명박 대통령에서 박 대통령으로 바뀌었고, 필기도구 등 각종 소품도 조만간 바꿀 것으로 알려졌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동아일보DB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동아일보DB
▼ 소련 “철의 여인” 조롱… 대처 “그말 좋네” ▼

진짜 변화는 소프트웨어… 무성(無性)의 지도자 대처


독일과 영국에서 여성 지도자의 등장에 따른 진짜 변화는 소프트웨어에서 두드러졌다.

또 다른 언론인 B 씨의 얘기다. “메르켈이 총리가 된 뒤 페터 슈트루크 사민당 원내대표를 만났을 때 ‘메르켈 총리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오전 9시에 총리실에 갔는데 레드와인 병이 없고 모든 결재 서류를 꼼꼼히 보고 사안을 완벽히 파악한 상황에서 지시를 주는 총리를 만나는 것도 즐겁더라’고 답하더라.” 역으로 슈뢰더 전 총리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메르켈의 ‘완벽주의’다.

대처와 메르켈이 총리직에 오르는 데 ‘여성’이라는 장점이 큰 영향을 미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무능한 보수당, 비리의 기민당은 개혁과 변화를 원했고 절묘하게 두 사람은 그때 그 자리에 신선하고 깨끗한 여자 정치인으로 서 있었다.

대처와 메르켈은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난 수재로 자수성가하며 남성들의 세계를 뚫고 올라가 정상에 이른 것부터 완벽주의와 강인한 1인자의 리더십을 보여준 점까지 같다. 그리고 과학도 출신인 두 사람은 총리가 된 뒤 ‘여성’이라는 ‘성’의 문제를 논리와 이성, 한 치의 오차도 인정하지 않는 과학의 세계로 덮어 버렸다.

특히 대처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에 남자보다 더 차가운 중성의 리더십을 가미해 완전히 새로운 정치인상을 만들어 냈다. 영국 최고의 대처 전문가인 대처 전기 작가 존 캠벨 씨는 “대처는 섹스리스(sexless), 즉 무성(無性) 정치인이다. 본인 스스로 여자라고 인식한 적이 없고 남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스스로가 남자보다 더 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철의 여인’이라는 말은 옛 소련이 대처를 조롱하려고 지어낸 것이지만 정작 본인은 가장 좋아했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콜린스 대변인도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대처 총리는 ‘첫 여성 총리의 느낌이 어떠냐’는 질문을 제일 싫어했다. 이런 질문에 대처는 항상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여성 총리가 돼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대처의 완벽주의를 보여주는 숨겨진 일화. 대처는 전용 코디네이터와 미용사가 있었는데 특히 미용사는 각료회의장과 주요 회의가 열리는 곳에 모두 따라다녔다고 한다. 대처는 회의가 길어지거나 연속적으로 다른 회의가 이어질 때면 중간에 잠깐 옆방으로 가서 재빨리 드라이를 하고 나왔다. 머리 모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심지어 머리카락이 한 올만 삐져나와도 바로 손질을 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한국 여성 정치에 드리운 박근혜의 그늘

“마흔 넘어 둘째를 임신한 채 선거를 치르는데 나중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금배지를 달아야 하나’라는 깊은 회의가 몰려 왔다. 여기서 물러나면 지역주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정치적으로도 끝장이란 생각에 버텼지만 다시 하라면 결코 못 할 것 같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김희정 새누리당 의원(부산 연제)은 선거 뒤 주변에 넋두리처럼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도 여성 정치인들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은 어렵기만 하다.

이런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 여성 정치인들에게 ‘롤 모델’이면서도 넘어서기 어려운 깊은 그림자를 던지는 이중적 존재다. 박 대통령은 한국 사회가 배출한 거물급 여성 정치인 중 정치에 ‘다걸기(올인)’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서의 청와대 경험, TK(대구·경북)라는 확고한 지역 기반을 접어두고라도 남편과 자식이 없는 독신, 날씬한 체형에다 미인이라는 평가(문희상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까지 받는다. 반면 여성의 전통적 의무와 책임은 거의 없는 특수한 조건까지 겸비했다. 여기에 2004년 파산 직전의 한나라당을 ‘천막 당사’ 돌풍으로 살려낸 것으로 시작된 ‘보수의 잔다르크’라는 정치 역정과 이미지가 더해진다.

하지만 그런 박 대통령도 2006년 테러를 이겨내고 당내 자기 사람(친박)들이 ‘숙청’(2008년 총선 전 친박 대거 낙천)되는 상황을 참아가며 여기까지 왔다.

김용철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은 어떤 여성 정치인도 갖기 어려운 조건을 갖췄고 보수와 진보가 10년씩 권력을 분점해온 만큼 천시(天時)도 좋았는데도 일반 정치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고 평가했다.

후배 여성 정치인들도 이 점을 잘 안다. 대표적인 친박인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국회의원 노릇도 쉽지 않은데 한국적 상황에서 대통령을 꿈꾸고 도전한다는 게 웬만한 사람에게는 머나먼 산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성공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김희정 의원은 “선배 여성 의원이 나온 지역에서 다시 여성 정치인이 나올 가능성이 높듯이 박 대통령이 성공해야 ‘제2의 박근혜’ ‘새로운 여성 리더십’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선인 유은혜 민주당 의원도 “결국 현 시점에선 박 대통령이 성공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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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 다 던진 그들… 롤모델이지만 넘기 힘든 벽 ▼

‘엄마’ 같은 메르켈의 여성 리더십… “진정한 킬러일 수도”


메르켈 총리는 자식이 없다. 그는 “정치에 투신했을 때 35세였고 이후 아이를 갖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메르켈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무티(mutti·엄마)’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필요할 때에는 모성애적인 소통의 방식으로 상대를 설득하고, 따뜻하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데 탁월한 소질과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준다는 게 공통적인 평가다.

타냐 뵈르첼 베를린 자유대 교수는 메르켈의 이런 소통의 정치에 대해 “처음에는 그의 신중하고 다소 느린 스타일이 단점으로 부각됐다. 하지만 유로존 위기가 심화되고 유럽연합(EU) 전체가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그의 리더십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메르켈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모든 상황을 듣고 조율하며 최대공약수를 만들어 냈다”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가 어린 시절을 보낸 베를린 북동부의 우커마르크에 소유한 주말 별장을 이용하는 것도 편안한 소통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곳은 진짜 가깝고 필요한 사람을 초대해 자신이 재배한 채소 등을 갖고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는 비밀공간이다. 그는 여기서 온갖 농담은 물론이고 자신의 장기인 유명인 성대모사까지 해 보인다고 한다.

동독 출신으로 통일 후 1990년 첫 선거에서 메르켈과 함께 정계에 데뷔한 지한파 여성 정치인 카타리나 란트그라프 의원(기민당)은 “메르켈 총리는 누구와 만나도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말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상대가 공감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메르켈은 자신의 최측근을 모두 여성으로 채웠다. 독일 정가에선 “독일은 여성 3인방이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이 3인방은 ‘걸스 캠프(girls camp)’로도 불린다. 메르켈 총리, 메르켈의 분신으로 불리는 베아테 바우만 총리비서실장, 에바 크리스티안젠 정책기획특보를 일컫는 말이다. 메르켈의 양 날개로 불리는 이들은 메르켈이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했다. 메르켈이 만나야 할 사람을 정하는 것부터 총리가 내리는 모든 정책 결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남성보다 여성, 새 사람보다 아는 사람을 믿는 메르켈의 스타일은 동독 공산 정권의 감시 속에서 성장한 특수한 환경과 관련이 깊다는 게 B 씨의 분석이다. 그는 “메르켈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목사 사택 안에서만 편안하다고 느꼈다. 남자 측근 참모로는 로날트 포팔라 총리실 장관 정도가 유일하다. 자신처럼 정확하고 계획적인 사람을 좋아하다보니 남자보다 여자를 선호하게 된 것 같다. 특히 믿고 나눈 얘기가 외부로 새 나가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메르켈은 모든 회의의 의제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각료회의에서 그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장관은 무안해지기 일쑤다. 메르켈 총리는 툭하면 회의를 여는 유럽연합(EU) 회의장에서도 가장 끈기 있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정평이 나 있다. 독일 정치권 관계자는 “EU 정상회의는 새벽은 물론 아침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다과와 함께 쉬는 시간을 갖는다. 피곤한 참석자들은 뻗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메르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끈기와 집요함에서 메르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1월 30일 베를린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스스로 총리에 오른 지 80주년을 기해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는 기념식이 임시의회로 열렸다. 마침 연방공보처의 초청을 받은 기자는 이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행사가 시작된 지 30분이 지나자 지치고 몸이 경직돼 불편한 듯 허리를 구부렸다 펴고, 어깨를 움직이기도 하고, 의자를 좌우로 조금씩 돌리는 각료들이 있는가 하면 옆 사람과 간단히 귓속말을 하는 각료들도 있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는 한 시간 내내 허리를 편 채로 두 손을 앞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있다가 증언이 끝나자 나치 박해 생존자의 손을 잡고 회의장을 나갔다.

메르켈 총리가 ‘킬러’ ‘독거미’ 등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언론인 하요 슈마허는 “메르켈은 경쟁자들을 암살하지 않았다. 단지 자만심과 조바심에 젖어 오판과 실수를 반복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다. 메르켈이 남자 정적들을 제거한 것은 독이 아니라 인내심이었다”고 설명했다.

무능한 부하를 제거할 때 쓰는 전술도 놀랍다. 한 정가 소식통은 “메르켈은 무능력한 부하에게 도저히 해낼 수 없을 만큼 어렵고 큰일을 준 뒤 스스로 무능력을 깨닫거나 주변의 비판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든다. 그녀는 진정한 킬러다”라고 말했다.

대처가 남긴 빛과 그림자

대처는 가끔 여성의 장점을 이용했다. 한 예로 작가 캠벨은 “대처는 크고 어렵고 복잡한 이슈들을 가정사에 빗대 설명하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냉전 시대의 국제 관계를 가정의 가족 관계로 설명한다든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비교할 때도 가정 경제를 꾸려 나가는 방법으로 비유를 하는 것 등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본질과 거리가 멀었다. 캠벨은 “대처는 여성성을 내보이는 여성 정치인은 총리가 되기 어렵다는 한계를 만들어버렸다. 여자가 많은 걸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그런 성공을 위해선 남자보다 더 남자다워야 하고 가족과 사생활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지적했다. 캠벨의 이어지는 얘기다. “대처는 자신을 성공한 남자처럼 키우려 한 아버지에게만 좋은 딸이었다. 항상 아버지만 언급했으며 어머니와 자식들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결혼한 지 1년 후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지만 가정일은 완전히 버렸다. 자식들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이들 이란성 쌍둥이는 모두 훌륭하게 자라 현재 아들은 사업가로, 딸은 기자 겸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폴리 토인비 씨의 의견도 비슷하다. “대처 이후 여성의 사회진출이 조금 많아진 건 사실이나 대처와 연결시키는 건 무리다. 분명한 건 대처가 여성의 인권이나 사회 진출을 위해 직접적으로 노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 단 한 명의 여성도 각료로 임명하지 않은 총리는 대처가 유일하다.”

토인비 씨는 대처의 또 다른 그늘을 이렇게 지적했다. “대처로 인해 노조의 힘이 약화됐고, 이를 통해 고질적인 인플레이션 문제가 해결됐으며,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는 대영제국의 자긍심을 높였다. 하지만 대처는 정책적 측면은 물론이고 이념적 측면에서까지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돕는다는 극단적인 신념을 통해 극단적인 부의 편중과 대물림을 고착화시켰다. 영국은 이제 불평등의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국가가 됐다.”

반면 콜린스 대변인은 “대처는 1989년 11월 폴란드를 방문해 독재 치하를 살아가는 국민에게 큰 희망을 전했다. 그녀는 서구 정치인들이 가만히 있을 때 소련에 대항해 일어섰고 소비에트 치하의 국민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결단력과 에너지를 통해 2차 세계대전 후 영국 사회에 만연해온 통제와 집단주의의 그늘을 걷어냈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조언… 대처의 신념과 메르켈의 포용력

대처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지만 국민은 그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한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지난달 ‘지난 반세기 동안 8명의 영국 총리 중 누구를 최고라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처가 압도적으로 1등을 차지했다. 메르켈도 경천동지할 일이 없는 한 9월 총선에서 다시 총리직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버려야 할까. 캠벨 씨는 “대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용기 있게 제시하고 설득했다. 위기에 처할수록 국민은 확신을 가진 지도자를 원한다.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살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토인비 씨는 “대처는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서 옥스퍼드를 갔고 혼자의 능력으로 최고의 리더가 됐다. 그래서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다르다. 아버지의 후광과 우호적인 정당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선됐기 때문에 대처 스타일에 치중하면 아버지의 독재를 연상시킬 수 있다. 특히 평등 문제에 대해 신경 써야 한다. 모두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은 채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대처는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박근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베일 교수는 “대처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듣지 않은 건 큰 잘못이다. 박 대통령은 비전을 가져야 하지만 자신의 계획을 바꾸거나 축소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지적은 메르켈 총리의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과 연결된다. 독일은 한국이 직면한 통일, 성장, 복지 등의 과제를 앞서 해결해내고 유럽 최강에 올라섰다는 점에서 한국에 시사점이 많다.

뵈르첼 교수는 “2차 대전 이후 주변 강국의 질시, 복잡한 국제정치 역학 속에서 지내온 독일처럼 동북아 패권경쟁, 북핵 문제, 남북통일 등 한국 역시 매우 크고 복잡한 이슈가 많다. 박 대통령은 메르켈처럼 크고 멀게 내다보면서 이견을 포용해주고 갈등을 조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저서 ‘미즈 프레지던트’에서 공존의 지혜를 가진 리더십을 강조했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내가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느냐’부터 자문해야 한다. 주어진 이익을 다 포기하고 세속으로부터 초연하며 경쟁자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대통령은 참모를 넘어 마음의 문을 열고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을 한 전직들과 어울려 지혜를 짜낼 수 있어야 한다. 정적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의 논리를 존중할 줄 아는 아량만이 이 나라를 하나가 되는 민주국가로 만들 수 있다.”

베를린·런던=이종훈 특파원·이승헌·백연상 기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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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여성권력자#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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