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 “포퓰리즘 비판, 국민도 우리편” vs 정치권 “불공정 척결대상인 대기업이”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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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화법으로 각 세운 재계… 정치권 향해 할말은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가 사전에 의논한 것은 없다. 내야 할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경제계에는 ‘정치가 이래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이심전심으로 생겨나고 있다. 국민들도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다.”

한 경제단체의 간부는 24일 이렇게 말했다. 최근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이 연이어 정치계의 포퓰리즘 정책에 경고를 날린 것은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향후 더 강한 발언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암시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양극화가 심해지자 사상 최대 실적을 내고 있던 대기업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동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초과이익공유제를 비판했을 뿐 다른 대기업 오너와 최고경영자(CEO)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최근 경제계 인사들의 쓴소리가 이어져 나오고 있다. ‘정치권의 행태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에둘러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 허 회장은 24일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하는데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원칙을 과연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많은 의문이 든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발언의 수위가 상당히 강하다고 생각한 기자들이 “최근 소신발언을 자주 한다”고 하자 허 회장은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번엔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가 배어 있다.

경제계의 발언은 청와대나 정부보다 정치권에 맞춰져 있다. 현 정부가 들어서며 내세웠던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계속되고 있지만 정치권이 표를 의식해 온갖 포퓰리즘 정책을 내놓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허 회장은 2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 정부가 내세웠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의 기조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제계는 포퓰리즘 정책의 예로 ‘감세(減稅)기조 변화’를 최우선으로 꼽는다. 감세는 소위 ‘MB노믹스’의 핵심 정책이었는데 한나라당이 ‘부자 감세’라는 프레임에 갇히면서 감세기조가 계속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감세 철회 주장이 나오면서 여야는 소득세와 법인세의 최고세율 부분에 대해서는 인하를 수차례 미뤘다.

대학 등록금 반값 인하, 초등학생 무상급식 등 기업의 경영활동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이슈도 문제 삼았다. 허 회장은 “등록금이 반값이면 직원들의 학자금을 지원하는 대기업으로서는 좋지만 그렇다고 대기업이 찬성해서 되겠느냐”고 말했다. 손 회장 역시 “무상 복지와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려면 예산이 필요하고, 이는 국민의 세금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에는 ‘국민도 재계 주장에 공감할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했다.

경제계가 최근 포퓰리즘 공약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정권 하반기 레임덕과도 일정 부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 시점에서 포퓰리즘 정책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면 ‘대기업=이익 독식’이라는 부정적인 국민 정서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초과이익공유제, 중소기업 적합품목에 대한 의견도 슬쩍 내놓고 있다. 대기업들은 그동안 이 주제에 대해서는 국민 여론을 살피며 제대로 의사표명을 하지 못했다. 손 회장은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자율적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레미콘, 두부 등 제품에 대해 중소기업 적합성을 분석하며 중소기업 적합품목에서 빼야 할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국회가 29일로 예정된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한 공청회에 허 회장의 출석을 요구한 데 대해 “과거 공청회 출석요구를 받은 경제인들도 대부분 출석하지 않았다”며 불참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경제계 일각은 “경제단체장에 대한 출석요구는 정치권의 재계 길들이기 의도”라며 불참을 지지했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 쓴소리에 발끈한 정치권… 여야 할 것없이 부글부글

법인세 감세 철회와 반값 등록금에 대한 재계의 비판에 정치권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앞 다퉈 복지 확대에 공을 들이는 데 대해 재계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라고 비난하자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정치권은 이번 논란을 일으킨 주요 경제단체 대표와 재벌 총수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국회 지식경제위 김영환 위원장은 24일 간담회를 자청해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포퓰리즘’이란 비판 발언을 할 수 있다. 다만 대기업은 그런 비판을 함과 동시에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불의하고 불공정한 거래를 척결할 때 더 사랑받고 성장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한진중공업 노사갈등과 관련해 조남호 회장을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한 국회 환경노동위의 김성순 위원장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조 회장이 한진중공업 사태의 핵심 인사이기 때문에 반드시 진술을 들어야 한다”며 “계속해서 청문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국회법에 따라 고발조치하기로 여야 간사 협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는 재계에 대한 성토장과 다름없었다.

손학규 대표는 “대기업을 대표하는 분들이 반값 등록금을 포퓰리즘으로 폄하하고 비하하고 있다”며 “피맺힌 학생과 학부모들의 절규가 포퓰리즘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감세가 투자를 촉진하고 고용을 창출한다고 했지만 과연 대기업들은 그동안 투자 증가와 고용 증가를 위해서 할 일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대기업은 양극화 해소의 주체가 돼야 한다”며 “복지시설에 조그마한 돈을 기부한 것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국회 환노위에서 한진중공업 조 회장을 청문회에 세우겠다고 했더니 (재계에서) ‘국회가 포퓰리즘에 젖어 일부 친노동계 정치인이 무분별하고 부적절한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거의 막말 수준에 가까운 성명서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영춘 최고위원은 “미국에서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상속세를 폐지하려 하자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부자들이 상속세를 내겠다고 했다”며 “그런 철학을 반영하는 대기업, 재벌, 경제단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불쾌감을 드러내긴 한나라당도 마찬가지였다. 안형환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재계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것”이라며 “재계가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때에는 전반적인 국민여론과 현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재계가 우려하는 포퓰리즘 정책에 대해서는 정치권도 새겨듣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거시적인 차원의 정책 추진과 비전 제시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일부에선 정치권이 재계를 압박하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비판론도 나온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허창수 회장이 정치권에 쓴소리를 했는데, 옳고 그름을 떠나 전경련 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발언”이라며 “국회의 국정 논의권이 이익집단의 압력에 의해 위축돼서는 안 되듯이 국회 또한 필요 이상으로 시장을 압박하고 기업인을 겁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선진당 임영호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감세 철회와 반값 등록금이 포퓰리즘이란 발언은 이미 여론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고 허 회장이 처음으로 제기한 것도 아니다”며 “이를 빌미로 국회 출석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권력남용”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한진중공업 조 회장의 국회 출석 요구에 대해서도 “노사분규가 해결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국회가 나설 수는 있지만 기업인에 대한 소환은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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