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한국病이다]<1>‘생존’에 목맨 정치인 ― 줄서기 강요하는 공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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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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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파 없으면 ‘스타’도 공천 유랑… 내년엔 빨리 줄 설 작정”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2008년 4월 총선 공천 때 ‘수모’에 가까운 경험을 했다.

나 의원은 서울 송파병 지역에 출마하기 위해 지역에 있는 남한산성 입구에서 토요일마다 명함을 돌리며 출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당 관계자로부터 ‘다른 지역을 알아보라’는 통보를 받았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적극적으로 이명박 후보를 돕지 않은 과거 때문에 친이(친이명박) 핵심 그룹에서 제동을 걸었다는 후문을 전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서울 중구로 나가라는 제의를 받았다. 나 의원이 난색을 표하자 “받으라면 그냥 받든지, 아니면 말라”는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나 의원은 이곳에 출마해 천신만고 끝에 재선 고지에 올라섰다.

같은 당 홍정욱 의원 역시 처음 서울 동작을 출마를 희망했지만 몇 개의 지역구를 유랑하듯 거론되다가 노원병 지역구를 받았다. 공천권자들이 판을 짜고 공천 신청자들은 바둑알 옮겨지듯 당내 역학관계에 따라 여기저기 밀려다니는 운명이라는 게 경험자들의 고백이다. 지역구민들의 뜻은 반영될 틈이 별로 없다.

한 의원은 “아무리 의정활동을 잘해도 소용없다. 공천 앞에선 ‘스타 의원’도, 평소 당당하던 중진 의원도 한없이 작아진다”면서 “힘 있는 후보가 내려오면 옆 지역구로 떠밀리고, 팔려가는 우리는 인신매매시장에 나온 매물 신세”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 가장 큰 원칙은 계파 간 나눠먹기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모두 당내 의원과 외부 인사들로 공천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한나라당 공심위는 친이계와 친박(친박근혜)계, 친강재섭계 등으로, 민주당은 손학규계 박상천계 등으로 구성됐다. 공천심사장부터가 계파 간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한나라당 공심위원을 지낸 A 씨는 “물갈이 폭을 크게 하되 계파 간 갈등을 줄이기 위해 영남지역의 경우 친이, 친박 1 대 1로 대응해서 현역 중진 의원들을 공천 탈락시켰다”고 털어놨다. 한나라당 외부 공심위원이었던 B 씨는 “공심위에서 법안발의 건수, 국회 출석률 등 의정활동이 훌륭한 영남 중진을 떨어뜨리려 해서 항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의원은 1 대 1 물갈이 원칙에 따라 결국 낙천(落薦)됐다”고 말했다.

인위적인 계파별 물갈이에 반발한 일부 친박계 의원은 탈당해 ‘친박연대’라는 이름도 희한한 당을 만들었고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갈등이 깊어져 국정운영에 적잖은 지장을 초래했다.

민주당의 18대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인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이사도 “당시 12명의 비례대표 심사위원은 최고위원회의를 거쳐 당 공동대표가 임명하게 돼 있었다”며 “공동대표들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그는 “손학규 박상천 당시 대표가 밀실에서 나눠먹기로 비례대표 순번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끝까지 중립을 지킨 ‘당이 중심 되는 모임(중심모임)’ 소속 원외 당협위원장 9명은 당시 “적장은 못 날려도 중립은 날아간다는 게 정치권의 정설이다. 내년 공천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18대 총선 공천에서 이들 9명 중 7명이 공천에서 떨어졌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지난 공천 때 중립 의원들이 너무 고생을 해 내년 대선에는 한결같이 빨리 줄을 서겠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 공천제도 대안은 있나


2008년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이었던 임해규 의원은 최근 ‘오픈 프라이머리 전도사’가 됐다. 임 의원은 자신이 관여한 18대 공천에 대해 “어느 국민도 공정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계파가 공천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국민 참여로 당 후보를 결정하는 오픈 프라이머리가 최선”이라고 말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상향식 공천 외에는 방법이 없다. 전략공천을 하더라도 당이 지나치게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장훈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8대 공천은 민주화를 역류한 밀실공천이었다”며 “당원과 일반인이 참여하는 절충형 오픈 프라이머리로 가되 현역 의원들만 유리하지 않도록 의정활동을 정확히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제) ::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 공직후보를 뽑는 당내 경선에서 당원 아닌 일반 국민에게도 투표권을 주는 예비선거제도. 당내 경선부터 국민 여론을 적극 반영해 본선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참여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명분도 있다. 그러나 당내 경선에서 정치성향이 다른 선거인단이 대거 들어오면 당원의 존재 의미가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정당정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선거가 후보의 인지도 위주로 결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 “상향식? 좋지요… 시늉은 할 수 있겠죠” ▼
공천개혁 현실의 벽


“엄연히 계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여권의 대주주인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합의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상향식 공천제도가 도입될 수 있겠느냐.”

한나라당 공천제도개혁특위가 주도하고 있는 상향식 공천제도로의 개혁 방안에 대해 한 수도권 재선 의원은 24일 “상향식 시늉은 내겠지만 큰 틀의 변화는 어려울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년에도 이 대통령과 친이(친이명박)계 주류, 벌써부터 ‘미래권력’으로 꼽히는 박 전 대표 등 당내 지배주주들이 공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내년 7, 8월경 대선후보 경선을 앞둔 대선 주자들이 내년 4월 총선후보 공천에서 현재의 계파별 비율을 건드리기 힘들기 때문에 과감한 공천제도 개혁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18대 총선 당시 공천 분란의 후유증을 경험한 여야는 모두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상향식 공천을 골자로 한 공천개혁안을 마련했지만 당 지도부는 본격 논의조차 머뭇거리고 있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를 채택하기 위해서는 여야가 당헌, 당규를 개정하고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와 법사위 본회의까지 거쳐 법 개정을 해야 하는 등 갈 길이 멀다.

한나라당 공천개혁특위안은 당 지도부가 국회의원 후보를 공천하는 ‘전략공천’을 20% 이내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대의원과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상향식 공천을 하자는 게 골자다. 60여 명의 한나라당 의원들도 상향식 공천 추진 모임을 만들어 힘을 보태고 있다.

한나라당 나경원 공천개혁특위 위원장은 “정당은 당원과 국민의 것인데, 정당이 정치인의 것이 돼 국민과 유리되고 있다. 상향식 공천개혁을 통해 정당민주화를 완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도 “민주적이고 참여가 보장된 상향식 공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벌써부터 “쉽지 않은 얘기”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당 지도부는 후보의 경쟁력 약화, 경선비용 증가, 경선 탈락자가 후보를 돕지 않는 부작용 등을 들어 계속 시간만 끌 소지가 크다”고 내다봤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 ‘정치신인 등용’ 외국은 ▼

당 지도부의 의중이 반영되는 공천을 통해 정치인을 발굴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정치 신인에게 문호가 활짝 열려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프라이머리’로 불리는 예비경선으로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후보를 뽑는다. 당 지도부의 의중과 상관없이 예비경선에서 지역주민에게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당의 최종 후보가 되는 시스템이다. 당 지도부가 예비경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예비경선에 나서는 후보자는 10명을 넘는 경우가 많다. 주마다 다소 다르지만 예비경선에 등록하려면 3000∼5000명의 지지자에게서 서명을 받아야 한다. 지지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지 못할 경우엔 소정의 등록비를 내면 된다. 상원의원의 경우 예비경선에 나서려면 28세 이상으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미국에선 의원보좌관으로 활동하다가 시의원과 주 하원→주 상원→연방 하원→연방 상원 식으로 ‘사다리’를 밟아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골드만삭스 회장을 지낸 존 코자인 전 뉴저지 주지사처럼 아무런 정치경력 없이 돈으로 당선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일본에는 세습 정치인이 많다. 2009년 중의원 선거 출마 후보 가운데 자민당은 326명 중 35%인 113명이 세습 정치인이었다. 민주당은 330명 중 11%인 37명이었다. 세습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많아 점점 줄어드는 추세지만 여전히 ‘대대로 정치인’이 많은 편이다. 민주당의 정치신인 후보는 164명이었고 출신별로는 지방의원 39명, 전직 관료 16명, 기업인 13명 순이었다. 1979년 마쓰시타전기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국가리더를 육성한다는 취지로 설립한 마쓰시타정경숙도 정치인 충원의 주요 통로다. 중의원 480명 가운데 30명 정도가 이곳 출신이다. 지연 혈연 학연의 배경이 약하고 세습도 아닌 정치신인이 많이 찾는다.

유럽에선 당에서 인재를 키우는 방식을 선호한다. 한국처럼 선거 때마다 새 피를 수혈한다며 외부인사를 내세우는 일은 거의 없다. 정치지망생들은 20대 때부터 당원에 가입해 밑바닥부터 정치를 경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프랑스에서는 의원들이 각료나 지방자치단체장을 겸임할 수 있어 정치입문생들은 지방의회 의원과 기초자치단체장부터 서서히 코스를 밟아 중앙무대로 올라가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 독일의 경우도 정치지망생은 젊은 시절부터 당에 가입해 밑바닥 정당생활부터 경험하는 게 정통 코스다.

특파원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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