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져야 본전” 年3만건 상고… 대법관 1인당 2700건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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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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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갈 데까지 가보자.” 1, 2심 법원의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며 지난해 대법원에 상고한 사건 건수가 사상 처음 3만 건을 넘어선 것으로 8일 확인됐다. 대법원 상고 사건이 2004년 2만 건을 넘어선 지 불과 5년 만이다. 상고 사건이 폭증하면서 대법관 1명이 처리해야 하는 사건 수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러 일부 대법관들은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국민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약식명령 불복 늘어나고 “면회 자주하려” 황당 상고도
봐야할 재판기록 수만쪽 연구관들이 사실상 ‘대행’
“결국 국민들이 손해” 지적

○ 대법관 한 명이 하루에 7건 처리해야


대법원에 따르면 2009년 한 해 접수된 상고 사건은 모두 3만2361건. 2008년(2만8040건)보다 15.4%나 늘어 처음으로 3만 건을 훌쩍 넘어섰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하고 3개의 소부(小部)를 구성하는 12명의 대법관이 1인당 평균 2700건에 가까운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셈이다. 대법관 모두가 1년 365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다 해도 하루에 7건 이상을 검토해야 모두 처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법원까지 가서 다투는 사건은 재판기록만 수천 쪽에 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법관 1인당 하루에 들여다봐야 하는 기록의 양은 수만 쪽에 이른다.

이 때문에 대법관이 직접 사건을 검토할 것이란 소송 당사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상고 사건은 대법관들을 보조하는 90여 명의 재판연구관들이 사실상 재판을 맡는 ‘연구관 재판’이 돼가고 있다. 하지만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연구관은 전통적으로 판사들이 선호하는 법원 내 요직인데 최근 상고 사건이 급증해 업무 부담이 너무 커지면서 그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전했다. 자연히 상고심에서 활발한 구두 변론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매달 두 번 열리는 대법원 선고 기일에 대법원 재판정을 가보면 대법관들이 수백 건의 사건번호와 선고 결과만을 되풀이해 읽기에도 바쁜 모습이 연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A 대법관은 “대한민국 대표 법원의 모습이 이렇다 보니 ‘정책 법원’이 된다는 것은 현재로선 꿈일 뿐”이라며 “상고 사건 급증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국민”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는 대법관들이 적지 않다. B 대법관은 최근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피부에 물집이 생기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대상포진을 앓았다. C 대법관은 치아와 몸의 균형을 유지해주는 귓속의 전정기관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다. 대법관 임기 6년을 채우고 난 뒤 긴장이 한꺼번에 풀어지면서 시력이 급격히 감퇴하거나 건강 악화로 쓰러진 대법관도 있었다.

○ “머리 기르고 면회 자주 하려고…”

최근 상고 사건이 크게 늘어난 것은 형사사건 상고 건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형사사건 상고 건수는 1만8235건으로 전년 대비 24%나 폭증했다. 같은 기간 민사사건이 7%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3배 이상 많은 것. 이처럼 형사사건 상고가 급증한 것은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가 미결구금일수 가운데 일부를 형기에 산입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 형법 조항에 위헌 결정을 내린 영향이 크다.

헌재 결정에 따라 재판을 기다리며 미결수로 구금된 기간도 모두 형기에 포함되면서 재판이 길어져도 피고인들이 손해 볼 게 없는 셈이 됐다. 미결수 신분으로 상고심 사건을 기다리면 머리도 기를 수 있고 면회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상고이유서에 ‘가족과 면회를 자주 하고 싶어서’라는 황당한 사유를 적어놓은 피고인도 있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법원의 약식명령(재판 없이 벌금형 선고)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며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도 상고 사건 증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약식명령으로 벌금형 선고가 예정된 피고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식 재판을 청구하더라도 약식명령보다 높은 형을 선고하지 못하게 한 ‘불이익 변경 금지 원칙’ 때문에 피고인 쪽에서는 손해 볼 게 없기 때문. 오히려 정식 재판을 통해 벌금액수가 낮아질 가능성이 생기는 데다 재판을 하는 동안 벌금 납부를 미룰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정식 재판 청구 건수가 꾸준히 늘면서 상고 건수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법원의 분석이다.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 ‘상고 홍수 ’ 해결책은 없나

고법 상고부 설치
변호사 업계 이해관계 갈려
대법관 수 증원
대법 “권위만 떨어져” 난색
상고허가제 도입
“국민권리 침해” 1990년 폐지


폭증하는 대법원 상고사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방안이 제기돼 왔다. △고등법원 상고부 설치 △대법관 수 증원 △상고허가제 도입 등 크게 세 가지다.

이 가운데 고법 상고부 설치 방안은 전국 5개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두어 상대적으로 사안이 중대하지 않은 상고사건을 처리함으로써 대법원은 업무 부담에서 벗어나 정책법원으로서의 기능을 되찾도록 하자는 취지다. 2006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했지만 수도권과 지방 변호사 업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무산됐다. 상고심 사건을 누가 수임하느냐가 변호사 업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면서 수도권과 지방의 변호사들이 팽팽하게 맞섰던 것. 수도권의 변호사들은 “하급심 법원의 역량 강화와 대법관 수 증원을 통해 상고사건 폭증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법 상고부가 설치돼 전국으로 상고사건이 분산되면 그동안 독점해온 대법원 상고사건 수임을 ‘나눠먹기’ 해야 한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한 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지방 사람들이 비싼 인지대를 내고 대법원에 상고해도 대법원은 사건이 많다는 핑계로 사건을 제대로 심리하지 않고 기각하는 사례가 많다. 전국 5대 고법에 상고부를 설치해 ‘가벼운 사건’들을 처리한다면 이러한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이 지난해 7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개정안은 고법 상고부가 대부분의 상고사건을 처리하되 중요 사건은 대법원에 곧바로 상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법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대법관 수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한나라당 사법제도개선특별위원회는 대법관 수를 늘리고 대법원 안에 행정·형사·민사부 등 전문 재판부를 두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대법관 수를 늘리는 것은 근본적인 방법이 아니며 오히려 대법원의 권위가 떨어질 것”이라며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그 대신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자문위원회는 지난해 말 “상고 남용으로 인한 분쟁 해결 지연을 막고 법원의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상고를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1990년 폐지된 상고허가제를 되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서울중앙지법원장을 지낸 변동걸 법무법인 화우 대표는 “3심까지 받고자 하는 국민의 열망을 무시할 수 없는 현재 상황에서는 상고부 설치 방안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며 “가벼운 민사사건의 경우 1심부터 조정전치주의나 신속사건 처리방안 등을 통해 사건 수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美 상고신청 1만건중 80여건만 심리
英 법관 3명 위원회서 사전에 걸러내▼


주요 국가들의 최고법원 법관 수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많은 반면 무분별한 상고는 법적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각국 최고법원 법관은 한국과 중국 14명, 일본 15명, 영국 12명, 미국 9명 등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123명, 115명에 이른다.

2008년 말 기준으로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접수한 상고허가신청 건수는 약 1만 건.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이 가운데 사전 검토를 거쳐 80여 건의 사건만 심리한다. 일단 연방대법원 심리 사건으로 선정되면 철저한 구술 변론을 통한 집중 심리가 이뤄진다. 연방대법원 심리 사건을 맡아 변론할 수 있는 변호사의 자격과 수도 제한돼 있다.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의 구술 변론은 법률적으로는 물론이고 교육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중요 사건 변론이 열리는 날이면 재판정 주변은 방청객들로 북적인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나 하급심에서 판결이 서로 달라 판례를 통일할 필요가 있는 때에만 상고를 허가하는 상고허가주의를 채택하는 나라가 많다. 영국의 경우 누구나 상고허가신청을 낼 수 있지만 상고를 받아들일지는 3명의 법관으로 이뤄진 ‘상고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중요한 법적 쟁점이 있는 사건만 상고를 받아들인다.

독일도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나 대법원의 판단이 판례의 통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상고 사건 심리를 허용한다. 일본은 헌법 위반이나 판례 위반을 이유로 최고재판소에 상고할 수 있다. 그러나 원심판결에 최고재판소의 판례와 상반된 판단이 담겨 있거나 법령해석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사건만 상고를 받아주는 ‘상고수리제’를 채택해 사실상 상고를 제한하고 있다.

한국 1994년 마련한 ‘심리불속행제도’가 상고를 일부 제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제도는 상고 이유에 법이 정한 특정 사유를 포함하지 않은 사건은 심리하지 않고 기각하는 제도다.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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