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4층에 있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고문의 연구실은 냉전시기 미국 외교안보정책을 조율했던 거장(巨匠)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시절 내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미국 외교안보정책을 진두지휘했던 그의 연구실 사방 벽면에는 미중 수교, 아프가니스탄 전쟁, 헬싱키프로세스 조율의 현장이 담긴 빛바랜 흑백사진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았다. 지정학에 기반을 둔 현실주의 정치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대가인 그는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자문역을 맡는 등 민주당을 대표하는 최고의 외교안보전략가. 그는 2010년 세계가 직면하게 될 외교안보 분야의 도전, 새로운 동북아 협력의 미래, 여전히 고립의 길을 걷고 있는 북한의 선택, 중견국가로 거듭나고 있는 한국의 미래전략 등을 제시했다. 인터뷰는 지난해 12월 18일(현지 시간)에 진행됐다.》 미국의 대북정책 北核 6자합의 필요성 인식 각국 이해조율 쉽지 않을 것 평화협정 문제는 북한에 달려
美와 동북아 관계 日, 동맹관계 스스로 판단할 일 中, 강대국 걸맞은 책임감 필요 韓, 美와 동맹 한층 강화해야
오바마의 과제 이-팔 분쟁, 이란 핵, 아프간 도전 올해 미국이 직면한 3대 과제 결단 못 내리면 지도력 큰 타격
미국의 대표적 외교안보통으로 꼽히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고문. 세계를 체스판을 내려다보듯 조망했던 거장의 솜씨로 올해 세계가 직면할 외교안보 분야의 도전과 북한의 선택, 한국의 미래전략 등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오바마 대통령의 1년을 외교안보 정책면에서 평가한다면….
“미국의 외교안보정책 방향을 새롭게 재정의(redefine)했고 미국을 세계와 다시 연결(reconnect)했다. 하지만 산적한 국내 현안 탓에 외교안보 문제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그 결과 중동평화협상 등 몇 가지 문제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고 강력한 결단력을 갖고 현안을 해결하지 못한 것처럼 비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2010년 오바마 행정부가 직면할 가장 중요한 도전은 어떤 것인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란의 핵 야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도전을 미국이 직면할 3대 위기로 제시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문제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문제들은 미국이 직면하게 될 매우 즉각적인 위협이다. 만약 이른 시일 내에 이 3대 위기에 대한 일정한 속도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미국은 지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상호 연관성이 높은 이 3대 위기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것이고 국내적으로도 신뢰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차별된 외교안보정책을 사용하겠다고 했다. 과연 세계는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으로 좀 더 안전해졌는가.
“그가 분명 세계인에게 희망을 던져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밝힌 목표들을 정상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게 했다. 핵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가 과연 실행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을 갖게 한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해결책을 조언한다면….
“희망이 담대했던 만큼 결단력도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결정하고 전면에 내세운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이나 한국에 다 적용되는 이야기지만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나서서 자신이 세운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목표 설정 이유를 솔직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런 후 분명히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미국의 지도력은 어떤가.
“전임자가 바닥으로 끌어 내렸던 미국의 리더십을 얼마간 회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시에 큰 기대에 따른 실망감도 커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2010년에 생길 일을 정확히 예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반적인 추세는 전 세계적 측면에서 볼 때 거대한 혼란(chaos)으로 가고 있다. 미국은 전 세계에 좀 더 설득력이 있고, 수용 가능하고, 협력적인 리더십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문제 해결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북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긴박감 있게 대처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내 생각과 좀 다르다. 현재 상황은 미국이 북한에 일방적으로 수용 가능한 결론을 강제하거나 압박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미국도 북한과 양자대화를 통해 결론을 도출할 문제가 아니라 6자회담에 참가하고 있는 동맹국 및 파트너들과 함께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6자회담 참가국들이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지 않고 이 문제에 두는 비중이나 중요도에서도 차이가 좀 있다는 점이다.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국 역시 한반도의 안정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 한반도에 위기상황이 발생할 경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국에 불리한 결과가 올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국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고문이 동아일보 독자들에게 보낸 신년 메시지. “2010년 새해 행복을 기원합니다, 한국을 존경하는 친구로부터”라고 썼다.―미국 북핵 정책의 최종목표는 무엇인가.
“여러 목표가 산재해 있으며 모두 긴밀히 연결돼 있다. 가장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는 역시 비핵화 문제일 것이지만 이는 핵 비확산 문제와 관련돼 있고 체제개방 및 협력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동북아 안보는 물론이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편입되는 문제, 그리고 최종적으로 한반도의 통일문제와도 직결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자의적이었고 결과적으로 인위적인 산물이었다.”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필연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가 화두로 떠오를 텐데….
“한반도 평화체제는 비단 북한의 비핵화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이후 각국 간의 관계정상화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한반도 평화협정은 어느 누구보다 북한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불안한 체제다. 북한 스스로도 주변 국가들과 비교할 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실패한 국가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은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의 흐름은 점점 자유로워지고 북한 정권의 존립 기반은 약해지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체제가 직면한 현실을 더 많이 자각하고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북한이 택해야 할 길을 제시한다면….
“당연히 북한이 체제를 더욱 개방하고 안정화의 길을 걷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북한의 지도부는 개방의 길을 걷는 것이 결국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북한 체제의 최후로 연결될 것이라는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그 같은 우려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볼 때 북한에 대한 미국의 체제보장은 아무런 보장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다른 나라의 체제안전보장은 내부의 동력을 막아주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북한체제는 고립을 통해 자신의 체제를 연명하고 있지만 결국 이는 자기파괴 행위일 뿐이다.”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에서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상당 부분 일본에 달려 있는 문제로 보인다. 미국은 여전히 일본을 동맹국으로 생각하고 있고 미래에도 진정한 동반자의 길을 걷기를 원한다. 이 같은 동맹관계는 비단 동북아 지역에서뿐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 이슈에서도 그렇다. 미국은 일본, 중국을 연결하는 3각 협력을 강화하는 데도 관심이 있다. 물론 일본과 한국이 지역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 역시 환영한다.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모든 관계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일본의 몫이다. 일본이 한국 중국 일본을 잇는 3각 관계의 강화를 염두에 두고 미국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미국이 말릴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이 지역의 국가들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결국 일본이 현상유지를 타파하려는 쪽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일본에 지시할 수도 없고 장기적 관점에서 일본의 국익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무엇인가.
“아직 경제적 측면에서 공식적인 주요 2개국(G2)이라는 개념이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사실상의 G2 구조를 인정하고 미국과 중국의 지도부가 광범위한 이슈에서 협력을 다짐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국이 그만 한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은 이미 지역적으로 의미 있는 강대국이 아니라 일부 문제에서는 세계 차원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 조언한다면….
“한국과 미국은 안보 및 지역협력 문제에서 불가분의 동맹이다. 피를 같이 흘렸고 전쟁의 대가를 치렀다. 그 외에도 광범위한 미국 내 한국계 미국인 사회 등 한국과 미국을 유기적으로 끈끈하게 연결해주는 많은 연결고리가 있다. 미국이 한국에 동북아 지역의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역협력 못지않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미 관계의 강화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가장 전략적인 결정이다. 지정학적인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새롭게 지도국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한국이 택해야 할 전략은….
“한국은 새 시기의 새로운 비전을 찾고 있다. 동북아 지역에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세계 차원에서 지도국가의 위치를 찾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두 개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한편 미국과의 한층 강화된 동맹관계가 결합된다면 최상이 될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가 약화되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국 일본 같은 이웃 국가들은 한국보다 강한 나라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미국과의 관계 강화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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