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기업-규제완화 긍정적” 74%…“투자로 이어질것” 반신반의

  • 입력 2009년 8월 8일 02시 59분


#장면 1

지난달 15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노후차 교체 지원 정책과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을 거론하며 “자동차업계가 정부의 노력에 상응하는 움직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업계에선 실적이 좋은 현대·기아자동차그룹에 대한 ‘압박성’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기아차는 지난달 21일 2013년까지 3조6000억 원의 투자계획 자료를 배포했다가 돌연 취소하고 다음 날 4조1000억 원으로 규모를 늘려 발표했다. 현대·기아차 측은 부인했지만 “현대·기아차가 정부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장면 2

대기업 A사는 지난해 1억 달러 규모의 해외 광구 경매에 입찰하기로 했다가 입찰보증금을 송금하지 못해 곤란을 겪었다. 통상적으로 입찰 단계에서는 계약서가 없는데 관련 서류가 없으면 해외로의 송금을 제한하는 규정에 묶였던 것이다. 결국 이 회사는 한국석유공사 현지 법인과 컨소시엄을 구성한 뒤 현지 석유공사가 입찰보증금을 납부하는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정부가 친기업 정책을 편다고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는 제때 투자를 어렵게 하는 규제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잇달아 투자 독려하는 정부와 시각차 보여
“기업 피부에 와닿는 경영리더십 필요” 지적



동아일보 산업부가 국내 60개 업종별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현 정부의 기업 정책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주요 기업들은 친기업(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 방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사회통합을 이끄는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등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왔다. 많은 분야에서 규제를 완화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실제 기업의 투자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는 시각이 많았다. 리더십 부족 외에 글로벌 경기침체, 노사갈등 등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친기업 정책은 좋다, 그러나 실행 리더십은 부족하다”

설문에 응답한 대기업의 절반 이상은 ‘현 정부가 지난 정부보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과 ‘현 정부가 출범 초기에 표방한 친기업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체로 “그렇다”고 답했다. 최근 정부가 ‘친기업’에서 ‘친서민’으로 일부 정책 방향을 트는 분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상당수 기업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정부가 가장 잘한 기업 정책 중 ‘정부의 친기업 의지 표현’과 ‘수도권 규제와 금산분리 완화 등 규제완화 정책 추진’이라는 대답이 전체 응답의 4분의 3이나 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정부의 실행 리더십에는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가 경제위기 탈출과 고용 창출, 투자 독려를 위한 리더십을 잘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한 기업은 10곳 가운데 두 곳에 그쳤다. 설문에 참여한 한 기업 임원은 “정부가 친기업 정책을 통해 국민에게 기업이미지를 개선하고, 경영활동에 긍정적인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은 환영하지만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규제완화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경영 리더십’을 발휘해 각종 현안 해결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인세 감면 등 실질적인 혜택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특히 올해 말까지로 돼 있는 ‘임시투자세액공제(설비에 새로 투자하면 투자액의 5∼10%를 법인세에서 공제하는 제도)’의 추가 연장을 검토하지 않는 것은 친기업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동안 정부 규제 때문에 사업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한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대통령의 생각만으로 현장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며 “공무원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지침과 규정을 세세히 만들어 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동응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는 “기업들이 기대가 컸다가 효과를 체감하지 못해 실망감이 커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 정부 투자 압력에 기업들 ‘불편한 속내’

기업 부문의 투자 확대와 관련해 기업과 정부 측의 시각차가 크다는 사실을 이번 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노대래 기획재정부 차관보는 지난달 말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포럼에 참석해 “정부는 국민에게서 ‘왜 비즈니스에만 프렌들리하느냐’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노력해 왔다”며 “그러나 기업들은 실적이 개선됐을 뿐 투자를 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기업이 투자를 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 ‘정부의 투자 촉진 정책이 실제 투자로 이어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기업들의 답변은 긍정적인 의견과 부정적인 의견이 각각 21.7%로 ‘팽팽히 맞섰다. 특히 절반 이상이 ‘보통이다’라고 답해 정부의 투자 촉진 정책이 실제 투자 집행으로 이어질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대기업들의 잇따른 투자계획 발표와 관련해 순수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한 대기업 임원은 “지금같이 민감한 시기에 투자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룹 전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며 “하지만 위에서 투자를 독려하는 강도가 세지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올해 연간 투자계획을 발표하지 않은 삼성전자는 지난달 향후 5년간 5조4000억 원을 ‘녹색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사 관계자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연간이나 분기별 경영계획이 아닌 1, 2개월 단위의 ‘시나리오 경영체제’에 따라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 장기 투자계획 발표는 어렵다”면서도 “녹색산업 관련 투자에 대해서는 계획안이 있어 발표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송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이 선전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신성장동력에 투자해야 할 때”라면서도 “신사업 선정은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최근 제주에서 기자들과 만나 “사업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이라며 “이기지 못하는데 정부가 팔을 비튼다고 투자하겠느냐”고 불만을 내비쳤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기업들이 투자 촉진 정책에 일부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기업이 느끼는 개별적인 현실과 정부가 다루는 포괄적 정책수단 사이의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며 “투자 프로젝트별 현안을 기업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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