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블로그]1994년 7월 8일-김일성종합대학에서

  • 입력 2009년 7월 14일 10시 43분


김일성 사망 소식을 보도한 당시 한국 신문들
김일성 사망 소식을 보도한 당시 한국 신문들
김일성대 교내 안에 있는 용남산의 김일성 동상
김일성대 교내 안에 있는 용남산의 김일성 동상
김일성 사망 당시 엎드려 절을 하는 북한 주민들
김일성 사망 당시 엎드려 절을 하는 북한 주민들
이 글은 1994년 7월 8일을 평양에서 보냈던 저의 회고담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날이 무슨 날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김일성이 사망했습니다.

벌써 15년이 흘렀군요. 당시 여기 남한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김일성 사망은 언론 보도로 기억되겠지만, 저는 평양에서, 그것도 김일성의 이름을 딴 김일성대에서 김일성 사망을 맞았습니다.

그때 평양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나의 심정은 어땠는지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15년 전으로…. 그날 평양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7월 7일 저녁 대학 체육관에서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민족과 운명’이라는 북한에서 꽤 유명한 영화입니다.

9시에 영화를 보려 들어갈 때 하늘이 잔뜩 찌뿌드드했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10시 반쯤 체육관을 나서는 데 하늘에서 비를 내려 퍼붓는 것이...저는 평생 그런 폭우는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부터 비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한 시간 반 동안 영화를 보는 사이에 낮은 지대에는 허리까지 빗물이 찼습니다. 우산도 없고 해서 그 비를 다 맞으면서, 거친 물살을 가까스로 헤치면서 약 20분 동안 걸어서 기숙사에 왔습니다. 도착하니 그제 서야 몸이 얼얼했습니다.

11시 경 기숙사에 들어와 세면장에 가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하늘이 미쳤나. 뭔 일 내겠나보다”하고 우리끼리 희희낙락거렸습니다.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정말로 뭔일이 나긴 했습니다. 그때로부터 3시간 뒤 김일성이 죽었으니깐요. 정말 무서운 폭우였습니다.

훗날 북한 매체들에는 이를 두고 “수령님의 서거에 하늘도 펑펑 비통한 눈물을 쏟아냈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을 봤습니다. 아마 하늘이 낸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시키려고 했겠죠.

그런데 문제는 이 비 때문에 김일성은 죽었을지 모른다는 것이죠. 김일성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의료진을 태운 헬리콥터가 그날 밤 평양에서 김일성이 머물던 평북 향산 별장으로 급파됐는데 한치 앞도 가려볼 수 없어 착륙에 실패했고 결국 저수지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탔던 사람은 다 죽었다고 합니다. 아마 비가 오지 않았다면 김일성을 구급 치료하는데 성공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죽인 셈입니다.

그리고 훗날 탈북한 고위 간부의 증언으로는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평양에 있던 김정일도 이 헬기를 타고 가겠다고 했지만 고영희와 경호원들이 막아서 끝내 타지 못했답니다. 권총까지 빼들고 비키라고 했는데 경호원들이 끝내 안 물러섰다고 하네요. 에휴~경호원들이 그때 김정일의 고집을 막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역사에 직면해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날 밤에 어떤 역사가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우리는 그냥 잠이 들었고, 다음 날 8일 아침 대학에 올라갔습니다. 흔히 김일성 사망하면 8일을 떠올리는데, 우리는 8일 당일에는 아무 문제도, 아무 낌새도 못 채고 보냈습니다. 김일성은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습니다.

다음날 9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토요일에는 2강의만 하고 11시에 수업이 끝납니다. 아침에 12시부터 중대 방송이 있을 예정이니 대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죠. 그런데 저는 그런 지시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곧바로 기숙사에 내려와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여기서 설명하긴 좀 힘들지만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학에서 만든 어떤 한시적인 '임시 특별 조직’에 소속돼 학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때였습니다.

얼마 쯤 잠을 잤을까. 한 방을 쓰고 있던 동료가 툭툭 옆구리를 흔들면서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성하야, 밥 먹으려 갈 시간이다. 그런데 어째 저기 스피커 소리가 이상하네.”

북한에는 매 가정집 마다 스피커가 다 있습니다. 기숙사 매 방에도 스피커가 있는데 이는 당 정책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죠. 그런데 소리가 너무 낮아서 듣기 힘들고 그냥 무슨 말이 나온다 하는 정도만 들립니다. 그런데 스피커에서 아나운서의 말이 매우 침통된 어조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어느 항일투사가 서거한 모양이네.”

저는 이렇게 대답했죠. 그런 부고 방송은 종종 나왔거든요. 설마 김일성이 죽었다고는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자 이 동료는 “누가 죽었지?”하면서 책상을 끌고 가 스피커에 귀를 대고 서 있었습니다. 한참을 귀를 대고 있더니 “여기 와서 들어봐라”고 황급히 손짓합니다. 차마 그는 “김일성이 죽은 것 같은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혹 안 죽었는데 죽었다고 했다간 큰 일 납니다. 반동이 되는 거죠.

저도 책상에 올라가 함께 귀를 세웠습니다.

방송에서 “김일성 동지는 인민의 수령이었고, 어쩌고저쩌고~” 장황하게 이야기 하는데 한 2~3분 있으니 “김일성 동지의 서거는...”하는 대목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보았습니다.

잠시 뒤 동료의 첫 말은 이랬습니다.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죠.

아니, 나중은 고사하고 이제 당장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북한에서 배웠던 대로 하려면 당장 대학에 뛰어올라가야 하겠으나 문제는 지금이 식사시간이라는 것.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밥이야 먹고 가야지”하고 결론 내렸습니다. 김일성이 죽은 사실은 배고픔 때문에 중요도 2순위로 밀려났습니다. 아~사람은 정말 배고픔과 타협하지 못합니다. 특히 기숙사생은요.

김일성대 기숙사는 밥 먹을 때 학부별로 모여 대열을 지어 노래하면서 식당으로 갑니다. 학부별로 식사시간이 있는 거죠. 우리 학부는 아직 대학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소속된 임시조직은 대다수가 중대방송을 안 듣고 내려와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오후에 할 일이 예정돼 있었거든요. 그날따라 식사시간이 됐는데도 소집구령이 나지 않더군요. 식사시간이 10분 쯤 지났는데, 드디어 반가운 “식사 모엿!”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줄 서려 밖에 나가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가 보였습니다. 이런 순간에 밥 먹으려 간다는 것이 뭔가 찝찝한 심정이었거든요. 그런데 밖에 나와 보니 다 나와서 줄을 서고 있더군요. 역시 대학에 뛰어올라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고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웬걸, 임시조직을 책임진 책임자는 옆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웃으면서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겉보기엔 제대군인, 노동당 당원에 대학에서 신임하는 사람, 곧 졸업해 큰 간부가 될 것이 분명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 때가 아마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지 한 시간 좀 더 지났을 때였습니다.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황급히 머리를 돌렸습니다. 저런 모습을 보고 가만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보위부에 끌려갈 일이니 말입니다. 외면은 어쩌면 몸에 습관된 반사행동이라고 할 수 있죠.

그날은 예외적으로 노래는 부르지 않고 밥 먹으러 갔습니다. 김일성대 기숙사는 일반 학생이 먹는 밥 량과 대열을 인솔해온 이를테면 학부 학생 간부들이 먹는 밥 량이 다릅니다. 간부들은 학부가 줄 서서 밥을 먹는 것을 통제하고 제일 마지막에 밥을 먹는데, 식당 아줌마들이 간부들에게는 밥을 꽉꽉 눌러 담습니다. 그래서 학생 간부는 밥을 다른 학생보다 2배나 많이 먹습니다. 똑같은 대학생임에도 말입니다.

간부에 대한 특권의식을 대학생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오히려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자본주의에서는 시위가 일어날 수 있겠지만, 북한에선 이런 특권에 대해 “사회주의 사회에서 어찌 이럴 수 있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게 배가 아프면 간부가 못된 자신을 탓할지언정...

그날도 우리 임시조직 책임자들은 식당 아줌마들이 꽉꽉 눌러 담아 준 밥을 다 먹더군요. 그것을 보면서 “저런 사람들이 저럴진대 내가 밥 먹으려 오기를 괜히 망설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밥을 다 먹었습니다.

밥을 다 먹고 대학에 올라갔습니다. 배도 채웠겠다, 오후 예정됐던 일도 취소됐겠다 이런 상황에서는 학부에 소속돼 조직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숙사에 그냥 있다가는 무슨 역적취급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만 아니라면 그 무더운 더위에 굳이 올라갈 일도 없겠지만...대학 정문까지는 쥐 죽은 듯 조용하더군요. 혼자 올라가는 것이 멋쩍을 정도로...매미 울음소리만 요란했습니다. 문뜩 매미가 언제부터 울었지 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하지만 대학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 울음소리들이 제 귀에 들어왔습니다. 수백 명이 일시에 통곡하는 소리가 용남산에서 들려왔습니다. 대학 구내에 있는 용남산에는 김일성 동상이 있습니다. 학부로 갈까, 용남산에 갈까 잠시 망설이던 저는 우리 학급 동료들이 용남산에 내려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가보니 수백 명의 교수, 학생들이 동상 앞에서 울고 있더군요. 군중 심리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 추동해 자신의 평소 신념과는 상관없는 행동을 저도 모르게 하게 만드는 그 힘을...

똑같은 김일성대 학생들이지만 한쪽에서 조직의 통제를 벗어났던 어떤 무리는 침착하게 밥을 다 먹고 올라오고(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 상황에서 농질까지), 단체로 모여 있다가 밀려온 무리는 대성통곡도 그런 대성통곡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때 당시 북한 체제가 빨리 붕괴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지만, 통곡하는 무리에 빠져들자 마자 감정적인 사람이 됐습니다. 다른 생각이 떠오를 새가 없이 슬퍼지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더군요. 머리 속에 생각이 많아서 그랬나 봅니다.

제가 묵상을 하고 되돌아서려는 순간, 한 대학 간부가 앞을 막았습니다.

“동무들, 동상 주위에 호상을 서주시오. 동문 여기, 동문 여기...”

자리까지 정해주면서 서 있으라는 바람에 내려가던 저를 포함한 약 30명의 학생들이 동상 주변을 둘러섰습니다. 그렇게 3시간을 서 있으니 교대시켜 주더군요.

그 3시간 서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 무릎아래서 울고불고 하다가 물러가고 또 교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교수, 학생 할 것 없이, 또 주변에 사는 주민들까지 우리 대학의 동상에 찾아와 울고불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드디어 한 시대가 갔다. 영생불멸할 것처럼 놀던 권력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는구나. 이제 이 나라는 어떻게 되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동유럽이 붕괴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습니다. 김정일이 과연 정권을 계속 이어갈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습니다.

“왜, 억울하게 지금이냐...내가 대학이나 졸업하고 죽지. 지금까지 대학 다닌 것이 물거품 될 수도 있겠네.” 그런 생각도 자꾸 들었습니다. 물론 그때 이미 반체제파였던 저의 생각과 충심으로 슬퍼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정말 슬퍼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고 봅니다.

처음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서로 눈치를 보았습니다. 이런 때에 대비한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시에 익숙 돼 있는 주민들은 물론 간부들 역시 어떻게 해야 충성심과 슬픔을 남보다 더 많이 표현할지 알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좀 시간이 지나니 동상 앞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술을 붓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이런 것을 자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는지 제사상은 점차 없어졌습니다. 9일 저녁 북한 중앙TV에서는 “김일성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김일성동지 동상을 지키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짤막하게 나갔습니다. 그리고 동상 주변에 둘러서 있는 학생들 모습을 TV에 내보냈는데, 저의 얼굴도 얼핏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저는 생전 처음으로 TV에 얼굴이 나왔습니다.

김일성대에서부터 시작됐다는 동상 지키기 즉 호상이라는 것을 처음 시작한 30인에 제가 든 셈입니다. 그때부터 북한 전역에서 이 호상 서느라 사람들이 녹초가 돼 갔습니다. 조를 짜가지고 새벽까지 하루 종일 계속 동상에 가서 서 있어야 했습니다. TV에서 방영한 것은 곧 이렇게 하라는 지시나 다름없었으니까요. TV가 전국 추모 행사 이모저모를 방영하면서 급작스런 상황에 갈팡질팡하던 사람들에게 추모 행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총지휘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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