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아들서 대통령까지

  • 동아닷컴
  • 입력 2009년 5월 23일 13시 30분



일가족에 대한 검찰 수사와 형사 처벌을 앞두고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인권변호사를 거쳐 대통령에 올랐으나 권력의 정점에서 물러난 뒤 불과 1년 만에 피의자 혐의로 검찰에 출석하는 운명이 됐다.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굴곡으로 점철됐다.

●빈농의 아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음력)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것이 없어 울다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외지고 척박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키가 작아 별명이 '돌콩'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1959년 대창초등학교, 1963년 진영중학교를 졸업했다. 생활기록부에 기록된 학창시절의 노무현은 친근하고 성실한 성품에 통솔력과 지도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어 있다. 몸이 약해 결석이 잦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반항아였다. 3.15 부정선거 직전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작문 과제를 내주자 반장이었던 그는 백지 제출을 주도했다.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 시절엔 학업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으나, 장학금 혜택을 받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어려서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가난 때문에 좌절과 방황을 많이 겪은 그였기에 늦깎이 고시 합격은 남다른 흥분과 감격을 안겨줬다. 그는 당시 소감을 고시계 1975년 7월호에 게재한 합격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형님! 지하에서도 신문을 보십니까." 그의 큰형 영현 씨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부산대 법대)을 나와 고시공부에 매달렸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73년 작고했다.

●인권 변호사

법관에 임용됐지만 그는 8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1981년 그의 인생을 또 한번 바꿔놓는 부림사건을 맡기 전까지 그는 그저 돈 잘 벌는 변호사에 지나지 않았다. 부산 향토기업들의 상속세 반환 소송 등을 도맡다시피 했고, 100억 원대 이상 거액 소송을 맡아 승률 90% 이상을 기록했다.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지내고 요트 타기도 즐겼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초기 부산지역 운동권 예비검속 차원에서 이뤄진 시국사건인 부림사건의 변호인이 된 노 변호사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57일간이나 불법 구금된 학생의 온 몸에 난 고문 흔적과 공포에 질린 눈을 보고 기가 막혔다. 그는 법정에서 고문과 조작을 폭로하며 검찰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민주투사로 변신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재야인사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1987년 2월엔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를 주도하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검찰은 그에 대해 이례적으로 하룻밤 사이 4번이나 영장을 청구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6·10항쟁으로 이어지면서 노무현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스타정치인

그의 활약상을 눈여겨보던 당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는 1988년 13대 총선 때 그를 영입했다. 정계에 입문한 그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드러내며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89년 12월 열린 전두환 전 대통령의 5공 비리 및 광주항쟁 청문회 때 명패를 집어던지는 사건으로 '청문회 스타'가 됐다. 이어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YS와 결별한 뒤 그는 YS의 '텃밭'인 부산에서 1992년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1996년 15대 총선 때엔 꼬마 민주당 후보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당선자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나섰던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1998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던 이 대통령이 의원직을 사퇴하자 노 전 대통령은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그는 다시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종로를 내던지고 한나라당의 아성인 부산으로 뛰어들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바보이기를 자청한 용기' '남들이 꺼리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바보' 같은 글이 쇄도했다.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된 것도 이때다.

●대통령후보

노 전 대통령은 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두면서 본격적으로 대권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노무현은 당내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인제 대세론'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그를 리더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2002년 봄 그가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설 때 정치권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폄훼했다.

하지만 2002년 3월 국민경선제라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이 시작되자마자 '노무현 드라마'는 시작됐다.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란 구호와 노사모의 열광적인 지원, 정치개혁의 상징물처럼 간주됐던 '희망돼지 저금통' 등은 거센 '노풍(盧風)'을 일으켰다. 경쟁 후보였던 이인제 의원이 장인의 6·25전쟁 당시 좌익 전력(前歷)을 문제 삼자 그는 "대통령 되려고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는 대응으로 상황을 역전시키고 후보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YS의 상도동 사저 방문과 김대중(DJ)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 비리 등으로 역풍을 만나면서 한때 60%까지 치솟던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와 8월 재·보궐선거에서 잇따라 민주당이 참패하자 경선 재실시 목소리가 높았고, 때마침 한일 월드컵 인기를 업고 부상한 정몽준 의원과의 후보단일화 압력이 거셌다. 결국 그는 이대로는 당선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전격 수용했다. 극적으로 단일후보가 된 그의 지지율은 다시 급등했고 그 여세는 대선 승리로 이어졌다.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각종 정치적 논란을 사실상 촉발했고 그에 휘말렸다. 재임 초기인 2004년에는 선거중립 의무 위반, 측근 비리 등을 이유로 국회에서 그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2004년 3월 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 14일까지 63일 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는 초유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위기 때마다 노 전 대통령은 강력한 방패막이로 '도덕성'을 내세웠다. 그는 2002년 12월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이권 개입이나 인사 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을 시키겠다"고 공언했다. 2003년 12월 불법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넘으면 재신임을 받겠다"고 했다. 그후 '10분의 1'이 넘은 것으로 드러났으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도 노무현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는 언론에서 측근 비리 의혹을 제기하면 "깜도 안 되는 소리를 쓴다"고 쏘아붙이고, 2005년 8월 국가보안법 폐지 등이 난항을 겪을 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는가 하면 2007년 4월 임기 말 권력 누수에 부닥치자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하는 등 끝없이 상대의 허(虛)를 찌르는 승부수를 던지며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언어와 태도에서 품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는 준비가 부실했던 것 같다"고 실토했던 것처럼 그의 말투나 발언 내용이 대통령답지 못해 그가 '한 일'에 비해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얘기들이 많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권위주의 타파 노력은 평가할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불법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대선 때마다 대기업들이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 줄을 서며 물밑으로 정치자금을 대야 했던 관행이 사라지게 했다는 평가다. 그는 또 자신의 지지 세력이 극렬히 반대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밀어붙여 타결지었다. 정치인으로서 이익을 따지지 않고 장기적인 국익을 생각해 내린 결단이었다.

●전직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2월 25일 새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퇴임 직전까지도 "대통령을 그만두면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으로 남고 싶다"며 정치활동 재개를 꿈꿨지만, 열린우리당 붕괴와 정권교체로 그는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은 평범한 농촌 사람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귀향 직후 마을 주변 정비와 화포천 습지 정화활동, 친환경 오리농업인 '봉하 오리쌀' 재배, 뒷산인 봉화산 나무 가지치기 등 환경정화 활동에 주력했다. 전국을 돌아보며 지역발전을 위한 구상에 몰입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높은 평가를 받아 가는 곳마다 지지자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귀향 4개월여 만인 지난해 7월 국가기록물 유출 논란에 휩싸인 데다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면서 퇴임 이후 정치적 행보에 나서려는 것 아니냐는 정치적 논란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엔 형 노건평 씨가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되는 등 친인척 비리가 드러나면서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급기야 올해 4월엔 4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검은 돈 수수 혐의를 시인하면서 전 가족이 검찰 수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4월 22일 홈페이지 절필 선언에서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저를 버리셔야 한다"며 착잡한 심경을 밝혔다.

그의 충격적인 서거로 기득권 세력에 끊임없이 맞서며 한국 사회의 틀을 바꿔 놓으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도전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번듯한 배경 없이도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도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됐다.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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