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수’ 목표로 시작한 감사…누구 입김으로 그냥 덮었나

  • 입력 2008년 10월 21일 02시 59분


전남도청앞 벼 야적시위 전국농민회 광주·전남연맹 회원들이 20일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 앞 광장에 벼 2800여 포대를 야적하고 있다. 이들은 부당하게 쌀 직불금을 받은 이들의 명단 공개와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벼 야적 시위를 벌였다. 무안=박영철 기자
전남도청앞 벼 야적시위 전국농민회 광주·전남연맹 회원들이 20일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 앞 광장에 벼 2800여 포대를 야적하고 있다. 이들은 부당하게 쌀 직불금을 받은 이들의 명단 공개와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벼 야적 시위를 벌였다. 무안=박영철 기자
■ 갈수록 커지는 의혹 4

《지난해 감사원의 쌀 직불금 감사 과정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가 감사 착수에서부터 감사 결과 보고에 이르기까지 개입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부당한 개입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독립기관인 감사원이 감사 결과를 최종 확정하기도 전에 청와대에 미리 보고한 것은 감사의 독립성을 스스로 훼손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1] 청와대 월권 논란

결과 사전보고 받아… “감사원 독립성 침해”지적

청와대가 쌀 직불금 문제의 심각성을 미리 알고 있었던 징후가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농림부는 2006년 말 이호철 대통령국정상황실장에게 “쌀 직불금 운영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 이 같은 상황을 미뤄 볼 때 청와대는 사안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예측했다고 볼 수 있다. 감사원 또한 이 문제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와대의 주문이 있고 난 뒤에야 서둘러 감사에 착수했다. 제도 개선을 목표로 하는 정책감사를 강조한 전윤철 감사원장의 업무 스타일에 비춰 볼 때 이 같은 청와대의 감사 지시를 업무 협조로 볼 수 있는 대목도 없지 않다. 청와대에서 쌀 직불금 문제를 ‘스크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포착됐다면 청와대와 감사원이 업무 협조를 한다는 사실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감사원이 7월 26일 열린 감사위원회의에 앞서 이호철 대통령국정상황실장과 노무현 대통령에게 감사 결과를 보고했다는 점이다. 감사원이 감사 결과를 최종 확정짓기도 전에 청와대에 미리 보고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설령 ‘대통령 관심사항’이라고 해도 먼저 독립기관인 감사원의 최종 합의기구체인 감사위원회의에서 올리는 게 수순이다. 이 때문에 감사 결과를 비공개키로 결정한 것에 청와대의 개입이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감사원 일각에서는 청와대를 감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감사원이 청와대의 지시를 받았다는 점에서 독립성이 심각하게 침해됐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노 대통령 퇴임 후 문제될 소지를 사전에 없애기 위해 임기 1년을 남겨 놓고 감사원을 동원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더욱이 차기 정권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쌀 직불금 감사가 시작됐다는 점에서 제도 개선을 우선으로 했다는 감사원의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2] 은폐 의문투성이

감사자료 전량 폐기 ‘단독 결정’ 보기 어려워

지난해 7월 26일 열린 감사위원회의에서 느닷없이 감사 결과를 ‘비공개’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과정도 석연치 않다. 감사원이 청와대에 미리 감사 결과를 보고한 바람에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떨치기 어렵다.

특히 쌀 직불금 문제처럼 ‘문제투성이’였던 사안을 징계자 없이 기관(농림부) 주의(注意)를 주는 선에 그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주의 조치란 ‘문제가 있으니 농림부에서 잘 살펴보라는 뜻’으로 경징계에 가깝다. 부당 수령한 쌀 직불금처럼 관리 소홀로 인해 예산을 터무니없이 낭비한 경우라면 당연히 장차관을 징계하는 게 일반적이다. 실무감사반에서 박해상 농림부 차관에 대한 주의 조치를 올렸지만 감사위원회의에서 ‘기관 주의’로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이 실무감사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처분 대상을 바꾼 것도 의문이다.

감사원은 또 17만3479명이나 되는 직불금 수령 비경작자 명단을 감사위원회의 직후 바로 삭제, 폐기 조치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마무리를 했다.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는 3만9971명의 직불금 부당 수령 공무원의 명단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데이터를 폐기 조치한 것이다. 아무리 제도 개선에 감사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고 해도 감사 결과의 기초가 된 자료를 전량 폐기한 것이 독단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 청와대는 감사 결과 은폐 여부 조사와 동시에 관련자 징계를 검토하고 있다. 또 직불제도를 처음 만들어 시행하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도 그대로 방치한 당시 농림부 관련자들에 대한 징계도 논의 중이다.

[3] 감사원 직무유기

부정 수령자 명단 확보해놓고 환수조치 포기

감사원의 ‘어정쩡한’ 행보는 감사 후 조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해 4월 감사원 감사계획서와 지난해 7월 작성된 추가감사계획서엔 ‘제도 개선’과 함께 ‘부당 직불금 환수’가 감사 목적으로 명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작 감사위원회의를 통과해 농림부에 통보된 감사 결과 처분요구서엔 제도 개선 위주로 권고했을 뿐 ‘부당 지급된 직불금 환수’ 부분은 빠져 있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의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은 “감사원이 농림부에 환수 권고 통보만 했어도 농림부가 부당 집행된 예산을 환수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농림부가 감사원에 포착된 17만여 명을 대상으로 환수 작업에 나설 경우 쌀 직불금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임기 말 정권에 부담을 줄 수 있는 폭발력을 감안해 환수 작업을 철회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감사원 관계자는 “당초 쌀 직불금 환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서도 “직불금을 환수하려면 경작자와 부재지주, 마을 이장 등으로부터 모두 확인을 받아야 하는 등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라 사실상 포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초 감사 계획대로 감사 의지가 흔들리지 않았다면 환수 작업에 나설 것을 촉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4] 거액의 국고손실

제도개선 늑장… ‘농민에 갈 돈 5000억’ 낭비

쌀 직불금 정책 실패는 결국 국민 세금 낭비로 이어지고 있다. 쌀 시장 개방에 대비해 농민들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쌀 직불금제를 도입했지만 당초 목적과는 정반대로 땅 투기를 한 부자들의 양도소득세를 피하기 위한 절세 수단으로 악용되는 등 부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더욱 부추긴 결과를 초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도에 문제가 없다’고 잘못 보고한 박홍수 농림부 장관에게 불같이 역정을 낸 것도 이런 사안의 심각성을 충분히 감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 감사원은 2006년 쌀 직불금 수령자 99만8000명 가운데 17만∼28만 명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직불금을 챙긴 것으로 보고 있다. 부당 수령으로 초래된 국고 손실 규모는 1인 평균 60만 원씩 1683억 원으로 추산했다. 2006년 지급 금액 1조1555억 원의 14%가량이다. 쌀 직불금 제도가 시행된 2005년 이후 지급한 직불금 액수는 2005년 1조5077억 원, 2006년 1조1555억 원, 2007년 9912억 원 등이므로 매년 14%의 부당 지급이 있었다고 가정할 경우 부당 지급 금액은 5116억 원에 달한다.

문제는 올해도 다음 달에 총 109만9000여 명에게 1조 원가량의 직불금이 국고에서 지급된다는 점이다. 이 중 9만1000여 명은 올해 처음으로 쌀농사를 짓겠다며 새로 직불금을 신청했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직불금 제도 개선방안을 담은 ‘쌀 소득 등의 보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10월 7일 국회에 냈지만 지금 당장 법안이 통과돼도 내년 생산분부터 바뀐 규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06년경 쌀 직불금 지급 문제점을 파악한 노무현 정부가 대책 마련을 서둘렀더라면 국고 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책임론이 대두될 것으로 전망된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전영한기자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변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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