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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5월 27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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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평가 - 선거 의식해 무리수… “제도 보완필요” 한목소리
‘품앗이 법안’ ‘땜질 법안’ ‘우회 입법’….
국회의원 보좌진 사이에서는 입법과 관련해 이런 용어들을 많이 쓴다. ‘품앗이 법안’은 의원들이 서로 공동발의를 해 주는 법안이고 ‘땜질 법안’은 용어 한두 개만 교체하는 손쉬운 법안 발의, ‘우회 입법’은 정부가 의원을 통해 대신 발의하는 것을 뜻한다.
법안 발의 건수를 올리기 위해 열을 올리는 의원들을 보좌하는 보좌진들은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며 내부적으로는 자성의 목소리도 내고 있다.
▽17대 국회 외화내빈(外華內貧)=17대 국회의원 발의 건수는 16대 1651건에서 17대 5728건으로 3.5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가결된 건수는 16대 256건, 17대 697건으로 2.7배로 늘어난 데 비해 미처리로 폐기된 건수는 16대 838건에서 17대 3357건으로 4배로 늘었다. 한 건의 법안도 가결시키지 못한 의원도 98명에 이르렀다.
17대 국회에서 전체 발의 건수 1위를 차지한 친박연대 엄호성 의원의 경우 1821건을 대표 혹은 공동 발의했다. 본인이 대표발의한 82건 중 가결된 건수는 6건에 불과했다.
엄 의원은 올해 2월 20일 하루 동안 상임위 10곳에 나눠 28개 법안을 발의했다. ‘사용자가 업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때는 종업원의 범죄행위가 있어도 사용자를 처벌할 수 없도록 한다’는 1개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이었다. 엄 의원 측은 “그 조항을 신설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28개 법안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일각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손쉽게 법안 발의 건수를 올렸다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체 법률은 올해 4월 말 현재 1246개다. 17대 의원들이 5728건을 발의했으니 일부 제정안을 제외할 경우 17대에만 의원들이 1개 법당 4개가량의 개정안을 발의한 셈이다. 예를 들어 국회법의 경우 17대 때 개정안이 무려 124개나 발의됐다.
한 보좌관은 “시민단체 평가, 의정보고서, 선거 홍보물에서 성공하려면 일단 법안 발의 건수가 많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의원들도 입법 활동이 거의 없었던 의원들보다는 낫게 평가해줘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의원 7명(이해찬 조순형 김종인 김근태 김송자 이인제 이원복)은 17대 때 대표발의가 한 건도 없었다. 대표발의 건수가 4년 동안 10건 이내인 의원도 106명이었다.
▽보좌진이 도장 찍기도=의원들은 국회법상 개정안을 발의할 때 10명의 공동발의가 필요하다. ‘품앗이 법안’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원들은 본회의 때 서명서를 가지고 다니며 동료 의원에게 공동발의를 부탁한 뒤 허락한 경우 나중에 의원 도장을 찍는 경우가 많다. 보좌관들이 의원에게 보고하지 않고 동료 보좌관의 부탁을 받고 공동발의자로 의원 도장을 찍어주는 경우도 있다. 한 보좌관은 “공동 법안 발의 요청이 왔을 때 깐깐하게 굴면 우리 법안도 도장을 잘 안 찍어준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의원 중에는 자신이 공동발의자이면서 실제 본회의에서는 기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은 2005년 11월 25일 같은 당 정의화 의원이 대표발의한 ‘정부산하기관관리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에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2006년 9월 8일 이 법이 본회의에서 원안 가결될 때 기권한 5명 중 한 명이었다. 이 의원은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가까운 의원의 부탁으로 공동발의를 했으나 실수를 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몇 글자를 바꿔 개정안을 내는 ‘땜질’ 법안의 경우 다른 관련 법안도 모두 바뀌기 때문에 여러 개의 법안 개정안을 낼 수 있어 발의 건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 1개 법안을 내용을 나눠서 여러 개의 개정안으로 발의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품앗이 법안’이라고 불린다. 대통령령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을 법으로 끌어올리는 내용의 개정안을 내 건수를 올리기도 한다.
▽정성적인 입법 영향평가 필요=공동발의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은 “공동발의라도 보좌진과 함께 면밀히 법안을 검토한 뒤 법체계에 모순될 경우 부탁한 의원에게 ‘공동발의도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도장을 찍어줄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한다”고 했다.
통합민주당 오영식 의원도 “공동발의도 보좌관과 당의 전문위원에게 면밀한 검토를 부탁한다”며 “입법 수요가 꼭 필요하다는 사전 조사가 나오지 않으면 법은 안 만드는 게 좋다”고 말했다.
김성원 국회 법제실장은 “미국처럼 법안 이름이 ‘대표발의자’ 이름의 법안이 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검토해야 한다”며 “의원들의 입법 활동을 정량 평가가 아닌 정성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학계나 시민단체들의 ‘입법영향평가’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의원은 이름 올려 좋고, 정부는 힘 안들여 좋고
법안 공생에 감시역할은 뒷전▼
“정부도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슬며시 의원 입법으로 제출하는 건 옳은 길이 아니다.”
1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최병국 법사위원장은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을 질타했고 정 장관은 “명심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날 법사위는 정부가 한나라당 윤두환 의원을 통해 발의한 ‘산업단지 인·허가 절차 간소화를 위한 특례법안’을 통과시켰다.
국회와 정부에서는 정부가 의원에게 부탁해 대신 법안을 발의하는 이른바 ‘우회 입법’ 근절을 외치고 있지만 17대 국회에서도 이런 사례가 이어졌다.
이는 정부와 국회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의원으로서는 손쉽게 발의 건수를 올릴 수 있고 정부로서도 복잡한 발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힘이 덜 든다.
의원 보좌관들은 매년 5월쯤 해당 상임위 부처 국장, 팀장을 불러 그해 입법 수요와 계획된 정부 법안을 들은 뒤 통과 가능성이 높거나 쟁점이 적은 손쉬운 법안을 넘겨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도 부처별로 쟁점이 있는 법안의 경우 법안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지역이나 상임위의 의원들에게 발의를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부 입법의 경우 법제처 심사, 부처 조정, 국무회의 의결 등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반면 의원 입법은 절차가 간단하기 때문이다.
윤두환 의원실에 따르면 국회 건설교통위원인 윤 의원은 2월경 국토부에 산업단지 절차 간소화에 대해 문의했고 국토부에서 관련 법안이 있다고 알려왔다. 의원실 보좌진과 국토부는 의견 조율을 통해 국토부가 준비한 법안을 일부 수정해 의원 이름으로 발의했다.
16일 통과된 소방산업의 진흥에 관한 법률안은 통합민주당 최인기 의원이 소방방재청의 요청에 따라 협조해서 발의한 법안이고, 2006년 본회의를 통과한 도로명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안은 민주당 강창일 의원이 행정안전부의 법안 제의를 받아 내용을 조율해 발의한 법안이다.
한 국회 보좌관은 “행정부를 감시, 견제해야 하는 입법부가 행정부로부터 법안을 받아 발의하는 것 자체가 국회 본래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며 국회가 정부에 휘둘릴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국회 보좌진은 “우회 입법을 비판하기 전에 국회가 독자적 입법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좌진 확충 등 입법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법제처 관계자는 “법제처에서 정부 부처별로 1년 발의 계획을 받아 관리하며 우회 입법을 못하게 하고 있지만 막을 뾰족한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특별 민원법?▼
16대 92개 발의됐던 특별법이 17대 때는 325개로 3.5배나 늘었다. 특별법은 특수한 사안, 특정 지역에 대해 예외적인 조항이 필요할 때 만드는 법으로 일반법보다 우선해 적용된다.
그러나 이들 법안 중 상당수는 자신의 지역구만 ‘특별히’ 지원하기 위한 내용이 많아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수원화성 역사문화중심도시 조성 및 지역에 관한 특별법,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대덕연구개발특구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법, 충청남도 청사의 소재지 변경에 따른 소재지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 과천지원 특별법,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관련 법안은 모두 그 해당 지역구의 의원이 발의한 것이다.
이들은 조세 감면, 특별회계 설치, 정부 보조금 지원 등 각종 지원을 법안에 담고 있어 조세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소관으로 이른바 ‘주변지역’ 법안이라 불리는 법안도 ‘지역 민원 창구 법안’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17대 때 36개가 발의된 ‘주변지역’ 법안은 발전소 주변, 군사시설 주변, 댐건설 주변, 탄약창 주변 등 혐오시설 주변에 있는 지역들에 지원을 해주는 법안으로 이 역시 자신의 지역구의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김성원 국회 법제실장은 “17대 들어 특별법을 많이 발의했는데 이는 예산의 불공평한 분배로 예산 왜곡이 발생한다. 신중하게 발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17대 전체 발의 건수 상위 10명 국회의원 전체발의(건) 대표발의 (건) 가결(건) 엄호성 1821 82 6 이인기 1248 24 4 안상수 1178 90 24 박재완 1108 74 1 이해봉 995 10 0 신상진 956 29 2 박상돈 946 52 13 황우여 924 18 0 정성호 860 66 8 배일도 838 25 4 자료: 국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