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연수]어떤 나라

  • 입력 2007년 12월 1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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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현순이와 열한 살 송연이는 평양의 중산층 가정 아이들이다.

대규모 매스게임에 참여하게 된 이들은 ‘장군님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열심히 연습한다. 아이들로서는 매우 힘든 단체 연습을 거의 1년이나 하지만 정작 장군님은 행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순이와 송연이는 “장군님은 나랏일 때문에 바쁘셔서 못 나오셨지만 다음 행사를 위해 더 열심히 연습하겠다”고 다짐한다.

영국 출신 대니얼 고든 감독의 2004년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원제 A State of Mind)의 내용이다. 부산, 시드니, 암스테르담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이 영화는 멀게만 느껴졌던 북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손에 잡힐 듯 보여 준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어린 소녀들이 집단 체조에 동원되는 모양이 안쓰럽고, 쌀과 땔거리가 부족해지자 현순이의 할머니가 “미제(美帝)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대목에선 안타까움이 생긴다.

그러나 공감 가는 부분도 많다. 밥 한술이라도 더 먹이려고 잔소리하는 어머니, 체조 연습을 빼먹고 땡땡이치는 아이, 공부 때문에 머리 아파하는 학생, 휴일에 대동강변으로 소풍 가는 가족 등은 한국인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고든 감독은 인터뷰에서 “남북한에서 모두 상영했는데, 양쪽 관객들이 같은 장면에서 웃었다”고 했다. 사회 체제가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고 원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꿈을 꾸고, 생활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하는 것….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다. 아무리 집단을 강조하고 국가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처럼 당연한 인간의 소망을 마음 놓고 추구할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고든 감독의 다큐멘터리도 1990년대 이후 유엔 추산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북한의 실상을 보여 주진 못한다.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고 찍었기 때문이다. 탈북자와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처참한 모습들은 바로 우리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파키스탄은 올해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반대 시위가 일어나는 등 혼란을 거듭했다. 미얀마에서는 승려들의 민주화 시위를 군부가 무참하게 짓밟아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그뿐이랴. 하루 1달러도 없어 죽어 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 종족 간 종교 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유럽과 북미, 아시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지구상의 많은 지역이 올해도 전쟁과 기아에 시달렸다.

한국은 학력 위조 파문과 아프간 인질 사태 등으로 온 국민이 사기당하고 테러당한 것처럼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BBK 특검으로 대선 후 정국도 순탄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고통 받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행복한 편이다. 잘못되거나 부실했던 부분들은 차분하게 고치고 채워 나갈 일이다.

올해 들어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이 재개됐다. 내년 2월 26일 평양에서는 미국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열린다.

새해에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따뜻한 봄바람이 불기를, 이 지구 곳곳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기를 소망한다.

신연수 특집팀 차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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